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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아 없어진 장애인 배려... 보도블록에 숨겨진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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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에는 점심시간에 몰려나온 직장인들의 발길이 쉼없이 이어졌습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배재학당을 지나 서소문로까지 걷다 보면, 적색 보도블록이 대각선 패턴으로 설치된 보행로의 중앙을 따라 약간 다른 모양의 블록이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길바닥 풍경이죠. 하지만 그 속에 장애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이 숨어 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사선으로 설치된 블록이 '새것'처럼 깨끗한 데 반해 중앙에 길게 이어진 블록들은 매우 낡고 더럽습니다. 군데군데 깨지다 못해 가루가 돼 부서지고, 그 위엔 시커먼 기름때가 눌어붙어 있죠. 이 '헌것'들은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입니다.
'점자블록'이라고도 부르는 유도블록은 시각장애인에겐 언어이자 이정표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은 유도블록의 돌기를 보조 지팡이로 긁거나 발바닥으로 쓸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깁니다. 돌기의 모양이 선형이면 직진을, 점형이면 시작이나 끝, 굴절, 위험에 대한 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길 50~60m에 걸쳐 설치된 유도블록은 돌기 대부분이 부서지고 닳아 없어져 평평합니다. 한마디로, '무용지물'인 셈이죠.
유도블록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은 '세월'로 추정됩니다. 관할 구청에 문의해 보니, 이 길에 보도블록을 마지막으로 교체한 건 10년도 더 지난 일이랍니다. 그 오랜 시간 발길에 치이고 밟힌 것은 물론, 풍화작용의 영향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유독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만 이 모양일까요?
알아보니, 새것처럼 보이는 적색 블록은 충격과 압력에 매우 강한 고강도 제품이지만, 유도블록은 콘크리트로 만들어 수명이 기껏 2년에 불과한 인터로킹 블록이었습니다. 지금의 규격에도 맞지 않아 이제는 생산조차 하지 않는 제품이죠. 이미 수명이 다 한 채로 10년 가까이 이 길을 지키고 있었던 셈이네요.
물론, 보도블록을 전면 교체할 당시에는 튼튼한 재질의 유도블록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 블록에 비해 수명이 짧은 유도블록을 설치했다면, 그 수명에 맞게 수시로 교체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연도에 따라 거리뷰 검색이 가능한 지도앱을 살펴보니 이 길에서는 부분적인 일반 보도블록 교체 작업이 수시로 있었습니다.
사진을 확인한 구청 관계자는 관리 소홀을 인정하면서, “서소문길 보도블록 훼손이 심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개·보수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김인순 한국장애인개발원 유니버설디자인 환경부장은 “유도블록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길잡이인데 이런 상태면 오히려 혼란만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일 줄 몰랐던 건 관할 구청 공무원뿐이었을까요? 이 길을 따라 사진 취재에 열중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이들이 무심히 보도 위를 지나쳤고, 유도블록의 정체를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짧게 설명을 듣고 나서는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장애인을 위한 블록이라고요? 전 어르신들 쓰라고 설치한 지압용 블록이 훼손되고 망가진 줄 알았어요.”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고취하자는 '장애인의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전국에는 여전히 무수한 ‘서소문로11길’이 존재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장애인 시설의 관리 부실이 이어지는 한 서소문로11길은 10년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 하루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에는 어떤 ‘길’이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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