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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도 싼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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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이런 일이 생기게 놔뒀어요. 당신의 아이가 당할 수도 있었고, 내 아이가 당할 수도 있었고, 누구든 당할 수 있었어요!”
영화 ‘스포라이트’ 중 마이크의 대사
보궐 선거가 끝났습니다. 내로남불과 생태탕, 페라가모 등이 키워드였던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누군가는 지지 정당의 승리에 환호하고, 누군가는 애정하던 정당의 참패에 낙담하겠지만,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지금 이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요.
저는 이번 선거를 지켜보며 새삼 성폭력과 2차 가해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서울ㆍ부산 시장의 공석이 성폭력과 관련된 데다 여권 인사들의 2차 가해성 발언이 꾸준히 흘러나와서입니다. 선거 후 기사 댓글에서도 2차 가해가 여전합니다. 여야 모두 이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혈세 824억원이 쓰인 이번 선거는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정치는 승부를 위해 존재하기보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거니까요. 때마침 지난 2월 개봉한 미국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이 지금 우리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듯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서른 언저리 여성 캐시(캐리 멀리건)는 낮과 밤을 전혀 다르게 보냅니다. 낮에는 한적한 카페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일합니다. 밤이 되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채 술집으로 향합니다. 그녀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도 매번 만취한 척 비틀거립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남자들이 접근하고, 캐시는 남자와 술집을 함께 나갑니다.
남자들은 매번 자신의 집으로 캐시를 데려갑니다. 잠자리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들이 흑심을 드러낼 때마다 캐시는 갑작스레 정신을 차린 듯 또랑또랑하게 말합니다. “내 이름은 알아?” 남자들은 당황하고 이내 상황을 파악합니다. 캐시는 술 취한 척 뭇 남자들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야한 차림새에 만취한 여자는 마음대로 농락해도 된다는 남자들의 고약한 착각을 깨고 싶어합니다.
캐시의 기이한 이중생활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니나가 7년 전 스스로 생을 마치면서 시작됐습니다. 소꿉친구인 캐시와 니나는 같은 의대를 다녔습니다. 니나는 1등을 놓치지 않던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Promising Young Woman)’이었으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남자 동기에게 몹쓸 일을 당한 후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캐시는 니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학교를 그만 둡니다. 이후 니나의 억울함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방향 없는 삶을 살며 남자들에게 자기 식의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캐시는 소극적인 복수로 살아가던 중 일하던 카페에서 의대 동기 남자 라이언(보 번햄)과 마주칩니다. 라이언은 보자마자 캐시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캐시는 유머 감각이 남다르고 친절한 소아과 의사 라이언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술집에서 만났던 숱한 남자들과 다르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남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걸림돌도 있습니다. 라이언은 자연스레 의대 동기들의 소식을 전합니다. 니나를 범하고도 단죄되지 않은 알과, 조신하지 못한 니나의 행실에 더 문제가 있다고 알을 두둔했던 여자 동기 매디슨이 각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캐시는 라이언과 원활한 관계를 맺기 위해선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니나를 성폭행한 알과, 2차 가해를 일삼은 매디슨, 알의 범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의대 학장, 알의 죄를 면하게 해준 변호사에게 자기만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캐시는 매디슨을 만나 니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도록 일을 꾸밉니다. 매디슨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뒤늦게 인정하면서도 이런 변명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렸잖아.” 20대 성인이었음에도 잘잘못을 깨닫지 못할 나이였기에 용서해달라는 말입니다. 매디슨의 저 발언은 용인해 줄 만한 것일까요.
지난 8일 법원은 텔레그램 대화방인 n번방을 운영하며 성착취물을 제작 배포한 혐의가 있는 ‘갓갓’ 문형욱에게 징역 34년을 선고했습니다. 문형욱의 나이는 24세입니다.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좀 더 젊었습니다. 20대 초반 해서는 안 될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문형욱의 죄를 ‘어리다’를 이유로 눈감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매디슨처럼 '여자가 만취했으니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혹한 2차 가해인데, 나이가 어리더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프라미싱 영 우먼’을 보다 보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알의 범죄에 소극적으로 대했던 의대 학장의 모습 역시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학장은 알이 전도유망한 청년이었기에 조사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알보다 더 빼어난 학생이었던 니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던 거죠. 학장의 생각은 매디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몸을 함부로 놀린 여자’ 니나가 사회 지도층이 될 남자 의학도 알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방관과 묵인, 편견의 작동이 진정 전도유망했던 젊은 여성 니나를 죽인 겁니다.
캐시의 복수는 사람들이 큰 죄의식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일깨워줍니다. 성폭력 영상물을 재미로 보고 이를 공유하는 행동과, 피해자를 나쁜 의도를 지닌 사람으로 매도하는 언행 등에 대한 경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시는 카산드라의 애칭입니다. 카산드라라는 이름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카산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카산드라는 자신을 사랑한 태양의 신 아폴론 덕분에 예언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트로이의 멸망을 내다보고선 그리스가 보낸 거대한 목마를 성안에 들이는 걸 반대합니다. 하지만 트로이 사람들은 승리에 환호하며 목마를 들였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 종반부에 캐시는 2차 가해를 저지른 지인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냅니다. “이렇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성폭력 피해자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보내는 경고성 예언과도 같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2차 가해를 범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 장면을 보고 나면 생각이 많이 바뀔 듯합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 장면에 응축돼 있습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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