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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약진' 택했던 아시아계 미국인... '애틀랜타 총격'이 그들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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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에 대한 우대(affirmative action) 조치의 정치적 정당성이 강한 미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은 특별하다.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모델 소수자(Model minority)'다. 소수자이지만,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실제로 '우대' 없이도 큰 성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계의 '조용한 약진'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오랫동안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권리를 위해 행진하지도, 시민 운동을 기획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열심히, 남들이 하지 않는 어려운 일도 도맡으며,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인종 차별이 적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증거'로 취급됐다.
최근 이 신화에 균열이 가고 있다. 올해 3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 로버트 애런 롱(21)이 한국계 여성 4명을 비롯해 8명을 총격 살해한 사건을 비롯해,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 범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이나 라틴계처럼 큰 논쟁을 부르진 않았어도, 미국에는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최초의 차별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켰다. 특정 민족의 노동자가 입국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은 미국 역사상 최초였다.
당시 반(反)중국인 정서가 극심했던 것은, 캘리포니아주 '골드 러시'를 계기로 수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유입돼,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법은 이를 노골적으로 반영했다. 중국인들은 1943년 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연합국의 편으로 간주될 때까지 자유롭게 미국으로 이주하지 못했다.
중국인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민자가 늘면서 일본인도 표적이 됐다. 1924년 통과된 이민법은 타 국가 출신 민족의 이민을 제한하면서 특히 일본인의 이민을 전면 금지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적대국이 되자, 일본계 미국인 약 11만 명이 강제 수용소에 머물렀다.
당시 일본계 미국인 중 8만여 명이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 혹은 3세였지만 관계없었다. 미국 정부와 여론은 일본계가 미국 대신 일본을 지지할 것을 우려했다. 같은 기간 독일계는 1만1,000명, 이탈리아계는 2,000여 명이 수용됐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1960년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일본계 역사학자 유지 이치오카(이치오카 유지, 市岡雄二)는 1968년 '아시아계 미국인'이란 개념을 거의 최초로 제시했고 유행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 정치 운동가들이나 이런 개념을 사용했지, 대중에게는 거의 와닿지 않은 개념이었다.
1982년 발생한 '빈센트 친 구타 살해 사건'은 그 인식이 변화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미국 중서부 미시간주에서 자동차 공장 노동자인 2명이 친과 술집에서 시비가 붙자 야구방망이를 들고 그를 쫓아가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일본과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이유였다. 친은 중국 출신이었지만, 일본계로 여긴 것이다.
범인들은 주 법원의 재판에서 벌금 3,000달러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받았다. "3,000달러짜리 살인면허냐"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결과적으로 연방법원 차원에서도 형사 처벌은 크지 않았다. 친 사건은 일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우리는 '진성 미국인'이 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자각의 계기가 됐다.
많은 아시아인은 차별에 맞서기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누구보다 "미국인답다"고 증명하려 했다. 이는 출신 성분 때문이기도 하다. 베트남계와 중국계 등은 전쟁과 공산 정권을 피해 '자유롭고 안전한 미국'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 외 아시아인들도 성공을 위해 적극 미국으로 이주하려 했다.
자연히 이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 고국의 대변인이라기보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적 가치'를 내면화하려는 이들이 됐다.
이렇게 저항하지 않고 각개 약진해 증명하자는 자세는 '모델 소수자성'으로 찬탄을 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냉전 시대에 중국은 미국의 적대국 중 하나였지만, 미국에 사는 중국계는 돈벌이를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자유로운 미국이 공산 체제와 대결에서 우월하다는 증거였다.
아시아계는 흑인이나 라틴계처럼 미국 사회에서 드러내 놓고 '정체성 정치'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이는 이들이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돈을 벌고 엘리트 계층으로 성공한 극소수를 빼고, 다른 아시아계 주민들을 '투명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시아계가 실제로 '아시아계'보다는 각 민족 정체성에 따라 뭉친다는 점도 '친 살해 사건'은 특정 국가 출신에 대한 혐오가 다른 아시아인들까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지만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때 한국계와 중국계는 본국이 일본의 침탈을 받은 역사적 맥락 때문에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일본인을 싫어한다"는 표어를 내걸기도 했다. 물론 일본계 미국인들이 당시 일본 제국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미군에 복무하며 일본과 맞서 싸웠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때 한국계 공동체는 큰 피해를 봤지만, 이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다수가 거주하는 일본계와 중국계가 이들을 돕겠다며 나서지는 않았다. 2001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때문에 파키스탄과 인도계가 표적이 됐지만 동아시아 출신 인종 공동체는 이에 무관심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텍사스 이민자 2세로 하원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한 한국계 공화당원 세리 김은 지난달 31일 열린 토론회에서 중국계 이민자들을 향해 "나는 그들이 여기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Because I’m Korean)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주장이 곧바로 강력한 역풍을 맞았다. 한국계로 연방 하원의원이 된 영 김과 미셸 스틸은 세리 김에 대한 지지를 공식 철회했다. '아시아·태평양계(AAPI)' 미국인 공동체의 단합을 깨뜨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김은 논란이 커지자 자기가 비난한 대상은 중국 이민자가 아닌 중국공산당(CCP)이라고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왜 아시아계가 하나로 뭉쳤을까.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 명백한 '아시아계 혐오 범죄'로서 그만큼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아시아계는 폭력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2020년 3월 텍사스 중부에서 19세 라틴계 남성이 "코로나를 퍼트리는 중국인들을 죽이겠다"는 이유로 버마계 일가족을 칼로 찔렀다. 피해자 가운데는 2세와 6세 자녀도 있었다.
같은 해 7월 뉴욕에서는 백인 남성 2명이 89세 중국계 여성을 때리고 몸에 불을 질렀는데, 추적 끝에 9월 검거된 범인은 13세 소년들이었다. 올해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태국 출신 이민자 84세 남성이 19세 흑인 남성에게 밀치기를 당했는데,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큰 충격을 받아 병원에서 끝내 숨졌다.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가리켜 '쿵 플루'나 '차이나 바이러스' 같은 표현을 사용한 이래,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 범죄는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세리 김처럼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같은 전술을 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인종적 기원을 둔 미국인들은 아시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아시아계 전문 정책 조사 그룹 AAPI데이터가 지난해 9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이후 인종 차별과 폭력에 대한 위협을 '매우 자주' 느낀 응답자들은 중국계(24%)보다 인도계(39%)와 일본계(28%)에서 더 많이 나왔다.
애틀랜타 총격을 계기로 발생한 '아시아인 혐오를 멈춰라' 시위에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시위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조직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되도록이면 정치적 활동과는 거리를 두어 왔던 '한인 교회'들도 움직이고 있다.
애틀랜타 한인 중앙 장로교회를 이끄는 한병철 목사는 폴리티코를 통해 전해진 인터뷰에서 "아시아계가 그동안의 무관심과 무책임에서 벗어나야 할 순간이자, 각성의 계기"라고 했다. 그는 희생된 한인들을 위한 추도회에서 설교했을 뿐 아니라 다른 11개 종교 지도자와 'AAPI 혐오 반대' 연대를 결성했다.
미국 정가에서 아시아계 인사들은 백인이나 흑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드물지 않다. 당장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인도계 출신이다. 지난 트럼프 정부에서 주 유엔대사를 지냈던 니키 헤일리도 인도계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양 갱' 돌풍을 일으킨 앤드류 양은 대만계다. 그는 현재 뉴욕시장 도전을 앞두고 있다.
다른 아시아계가 그렇듯이, 이들도 아시아계 혈통을 강조하진 않았다. 대신 똑똑한 엘리트임을 내세웠다. 양 갱은 아시아계라기보다는 '유능하고 젊은 지도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앤드류 양을 좋아한다.
양은 트럼프의 '차이나 바이러스'에 맞서 아시아계가 "더 미국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칼럼을 남겼다가 더 진보적인 아시아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시무 리우는 공개적으로 "곳곳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그냥 참기만 하라는 말이냐"고 양을 비판했다.
그런 앤드류 양도 이제는 아시아계로서 당했던 은밀한 차별, 투명한 인간이 되는 경험에 대해서 역설했다. 그의 전략이 바뀐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다. 뉴욕시에 그의 엘리트로서의 성격에 동조하지 않는 가난한 아시아계 유권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로 '아시아계'가 정치적 주체로서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양은 폴리티코에 자신의 정치 활동이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가 좀 더 정치에 관심을 두고, 더 많은 아시아계가 미국에서 정치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애틀랜타 사건 이후 비로소 주요 언론들이 '아시아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이 사건이 가시화의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관해 깊게 말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동안은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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