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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또 여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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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나서는데 발 아래 계단 돌에 하얀 꽃잎 몇 개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 봄을 알리는 매화꽃이었고, 그 다음에는 여리디 여린 살구꽃이었다. 계단 옆에 심은 나무 두어 그루에서 그리 많은 꽃잎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바람만 슬쩍 불어도 어찌나 우수수 꽃잎이 떨어지던지, 들썩이는 공기가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그러다 계단 가득 딸기우유라도 엎질러 놓은 듯 연분홍 벚꽃이다. 이즈음엔 주제가처럼 떠오르는 '벚꽃 엔딩' 노래가 슬며시 '여수 밤바다'로 이어지기 때문일까? 봄바람을 타고 꽃잎이 나니 여수에서 고작 칠 년 살아본 나에게 이것저것 여행정보를 묻는 지인이 부쩍 늘었다. 남해안 끝자락의 작은 항구가 이 노래 한 곡 덕에 한없이 낭만적인 도시로 등극한 것도 사실. 밥도 안 나오는 노래나 한다며 구박받던 베짱이들이 이토록 강한 힘을 가진 시대가 되었나 보다.
사실 나에게도 여수의 기억은 노래 한 구절이다. 향일암이 관광객으로 너무 붐빌까 걱정될 때, 그래도 일출은 보고 싶을 때, 여수사람들은 자산공원으로 간다. 참 고운 이름 ‘자산(紫山)’은 해 뜰 때 자주색으로 물드는 산봉우리 때문에 붙었으니 토박이는 다들 아는 일출명소다. 한쪽으로는 바닷가 절벽과 오동도가 또 한쪽으로는 여수항과 돌산대교가 내려다보이니 더 바랄 게 없는데, 그 바다로 향하는 시선마다 벚나무가 한가득이다.
봄날이면 오르는 길마다 발 아래에 벚꽃 잎이 무더기로 풀풀풀. "청사초롱 불 밝혀라 잊었던 그 님이 다시 돌아온다 닐 릴 릴 릴 리 닐리리야", 꽃놀이 나온 할머니가 흥에 겨워 선창을 하니 지나던 사람들에게서 단체로 답가가 돌아왔다.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난실로 내가 돌아간다." 순간 벚꽃은 눈처럼 휘날리고, 내가 정말 여기에 있는 건가, 선계와 속세를 오간 것처럼 아득해졌다.
이제는 떠나 온, 하지만 내내 그리운 여수의 기억을 봄날 떨어지는 꽃잎이 불러왔다. 가장 아름다울 때 끝나버린 탓에 영원히 아련할 첫사랑처럼 말이다. 바쁘고 정신 없는 시험기간일수록 왜 그리도 로맨스는 자꾸 파고들던지, 첫사랑의 만남과 첫 번째 실연은 왜 하나같이 벚꽃 떨어지는 날이었던지. 간신히 시험을 마치고는 퉁명스레 장난인양 건네 본 고백의 설렘도,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히 돌아서던 거절의 상처도, 와르르 왔다가 사라져버리는 벚꽃 덕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공부하기 싫을 때면 꼭 빠져들던 짝사랑처럼,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벚꽃은 생활의 비루함 따위는 잠시 잊게 해주는 묘약 같다. 무덤덤해진 줄 알았던 심장의 제일 보드랍고 연약한 부분을 가만히 꺼내 놓는 기분이랄까. 후두두둑 내리는 빗방울에 행여 꽃이 떨어질까 다같이 안달복달, 일 년의 며칠뿐이지만 여린 꽃잎 다칠까 살피는 그 마음도 참 예뻤다.
허나 꽃잎 떠나간 자리에는 화려하진 않아도 씩씩한 녹색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잘리면 잘리는 대로 금세 커가는 적응력에다 곧 다가올 여름 폭풍에도 끄떡 않을 강인함까지, 나무를 자라게 할 엔진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지저분한 낙엽이 될지라도 끝까지 애쓰고 버티는,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해도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저 잎사귀와 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꽃은 지고 푸른 잎이 돋는다. 진짜 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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