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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와인 명성 뒤엔 중세 수도자들 실험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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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겨울이 머물다 간 자리에 꽃이 피었다. 향기가 눈에 보일 듯 봄볕에 빛나는 꽃들. 하지만 화무십일홍. 꽃 진 자리에 허공이 들어차더니 이내 이파리가 돋았다. 완연한 봄이다.
4월이 한창이면 사과꽃이 보고 싶다. 봄을 품은 듯 특유의 싱그러운 향 때문이다. 그 향은 완연한 봄빛을 닮은 와인을 떠오르게 한다. 실은 이때쯤이면 필자는 샤르도네(화이트)와 피노누아(레드)로 빚은 와인이 그립다.
샤르도네와 피노누아 생각으로 입속에 침이 고일 때면 프랑스 부르고뉴가 떠오른다. 두 품종은 부르고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두 품종으로 빚은 와인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원산지도 부르고뉴이다.
부르고뉴에서는 갈로 로만 시대 초기인 1세기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해 중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기록으로 남은 부르고뉴 와인에는 ‘코르통 샤를마뉴’라는 화이트 와인이 있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부르고뉴 솔리외의 성 앙도슈 수도원에 헌납한 코르통 언덕에서 생산한 와인이다.
부르고뉴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수도원 수도자들의 덕을 크게 봤다. 980년 개혁을 부르짖으며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베네딕토회의 한 분파)이 부르고뉴 마코네에서 시작됐다. 그 뒤 또다시 개혁을 외치며 세워진 시토 수도원 역시 부르고뉴 디종 근처의 시토가 본원이다. 부르고뉴 와인은 클뤼니와 시토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발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자들이 포도 농사 지은 이유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며 초심으로 돌아간 수도자들이 의욕적으로 한 일이 기도와 더불어 몸을 쓰는 노동이었다. 그중에서도 포도 농사는 수도자에게 명분과 실리를 모두 안겨주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중세 부르고뉴 하면 ‘톤슈라’라고 불리는 독특한 머리 모양을 한 수사들이 연상된다. 이들이 포도밭과 셀러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 말이다. 포도밭 관리는 물론 포도나무 재배나 와인 양조에 실험적인 시도를 한 이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부르고뉴 와인의 명성과 전통이 탄생할 수 있었다.
특히 시토회 수도자들은 무척 세심했는데, 이들은 근접한 포도밭이라도 테루아르(토양과 지형과 미세 기후)가 다르면 와인의 맛과 향은 물론 품질까지 다르며, 해가 바뀌어도 이와 같은 특징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처럼 고유한 테루아르를 가진 각각의 포도밭을 ‘클리마’라 한다. 수도자들은 클리마를 세분화해 돌담(클로)을 쌓아 구획했다.
‘클리마’라는 개념은 부르고뉴 와인의 특색이자 핵심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 정도다. 1861년 본(Beaune) 농산물위원회가 포도밭 등급을 나눌 때도, 1936년 INAO(국립 원산지명칭 및 품질위원회)에서 원산지통제명칭(AOC)을 만들 때도 수도자들이 정립한 이 개념을 근간으로 삼았다.
앞선 칼럼에 언급했지만, 중세 초기 교회와 수도원은 세속화의 첨단에 있었다. 탐욕이 신앙심을 변질시키던 이때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재산 소유와 상속을 금지했고, 독신을 의무화했으며, 성직 매매를 금지했다.
당시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우스 7세 역시 교회 개혁에 앞장섰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그동안 황제가 해오던 성직자 임명권을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는 교황이 성직자를 직접 임명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측근들을 부추겨 교황을 내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눈치를 챈 교황이 먼저 황제를 파문하고 로마를 떠나 카노사성으로 가버렸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가진 중세 사람들에게 파문은 엄청난 형벌이었다. 파문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파문을 철회시키기 위해 궁리했지만,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힘 있는 영주들까지 교황 편에 서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고 했다.
다급해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빌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까지 찾아갔다. 황제는 한겨울임에도 얇은 옷차림에 맨발로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파문을 취소해달라며 교황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이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다.
가까스로 파문을 모면한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 힘을 키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몰아내고 다른 교황을 세웠다. 하나 반전이 일어난다. 언뜻 교황권이 약화하는 듯했지만 20년 뒤에는 더욱 강해져, 교황이 앞장서 십자군 전쟁(1096년~)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아무튼 앞서 언급한 수사의 머리를 톤슈라 스타일로 확립한 이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 수사 출신으로 교황이 되기 전부터 교회 개혁과 교황권 강화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수도자들의 기강을 바로잡아 베네딕토 규칙서를 엄격하게 지키게 했고 여러 제도를 시행하면서 수사들의 머리 모양 역시 바꾸도록 했다.
개혁의 기치를 올린 클뤼니 수도원은 점차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다. 기부와 상속으로 받은 토지가 원래 많았던 데다 십자군 원정에 나선 영주들과 기사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천국행을 기원하며 토지를 바쳤기 때문이다.
기증된 땅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오늘날 부르고뉴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생산하는 밭 대부분을 당시 클뤼니 수도원이 소유하게 된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의 소수도원이었던 생비방 수도원은 오늘날의 ‘본 로마네’와 ‘플라제 에세조’ 마을 밭 대부분을 기증받았다. 와인 애호가라면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로마네 콩티, 라 로마네, 라 타슈, 로마네 생비방, 라 그랑드 뤼, 리쉬부르, 에세조, 그랑 에세조 같은 그랑크뤼 와인이 바로 이 두 마을에서 생산된다.
한편 오늘날 부르고뉴에서 그랑크뤼 밭이 가장 많은 주브레 마을의 포도밭도 680년경 베네딕토회 소속의 베즈 수도원이 기증받았다. 부르고뉴 와인 애호가들은 아마 ‘샹베르탱 클로 드 베즈’라는 와인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베즈 수도원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주브레 마을은 나폴레옹이 특히 좋아한 와인이라 더 유명해진 샹베르탱이 생산되는 곳이다. 샹베르탱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마을 이름을 주브레 상베르탱이라 부르게 됐다. 1847년 주브레 마을 와인 생산자들은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샹베르탱 이름을 넣어 마을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원했다. 소비자들이 유명 포도밭에 비해 마을 이름을 잘 모르는 탓에 와인 판매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이를 허락하자, 부르고뉴에선 가장 유명한 밭 이름을 마을 이름 뒤에 붙인 곳들이 속속 등장했다. 주브레(샹베르탱)에 이어 모레(클로 생드니), 샹볼(뮈지니), 플라제(에세조), 본(로마네), 알록스(코르통), 퓔리니(몽라셰), 샤샤뉴(몽라셰) 등의 마을이 모두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괄호 속 명칭이 유명한 포도밭이자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 이름이다.
세금도 면제받은 시토회 수도자들의 와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의 외침은 탐욕의 소란을 뚫고 나온다. 하지만 개혁이 곧 탐욕의 다른 이름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클뤼니 수도원 역시 점차 세속화했다. 초기에는 수도자들이 직접 농사를 지었지만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세속 영주들처럼 소작인을 부렸다.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베네딕토 규칙서도 지키지 않는 수도자들이 허다했다.
이 문제를 자각하고 고민하던 일군의 수도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수도회를 만들었다. 1098년 설립된 시토회다. 후에 이곳 수도원장이 된 성 베르나르두스의 활약으로 시토회는 금세 80여 개가 생기더니 50여 년 만에 400여 개가 되었다.
시토회에서는 노동과 기도와 더불어 특히 베네딕토 규칙서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강조했다. 수도복도 염색하지 않고 소박하게 하얀색으로 입었다. 시토회 수도자들을 백의의 수도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수도원 건물이나 부속 교회 또한 화려하고 웅장한 클뤼니 수도원보다 최대한 장식을 삼가고 단순하면서도 검소하게 지었다. 수도자들은 한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고 바닥에 짚만 깔고 잠을 잘 정도였다.
시토회 수도자들은 주변 황무지도 부지런히 개간해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시토 수도원 역시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에 나선 여러 영주가 시토회에 땅을 기부하거나 유산으로 남긴 덕분이었다. 사실, 시토회를 발전시킨 성 베르나르두스가 십자군 전쟁을 독려했으니 영주들이 시토회에 땅을 기부할밖에.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토회 수도원들은 포도밭을 최소 1개 이상씩은 기부받았다. 또한 주변 포도밭 매입도 많이 해 오늘날의 샤블리, 코트 도르의 픽생, 샹볼 뮈지니, 부조, 본, 포마르, 뫼르소 마을 전역의 포도밭이 시토회 수도원 소유가 되었다.
한편 어느 곳이나 묵묵히 일하는 이들이 있다. 12세기 초에 오세르 근처에 설립된 시토회 소속 퐁티니 수도원 수도자들은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샤블리 포도밭의 가치를 알아차렸다. 코트 도르의 포도밭, 특히 부조 마을의 ‘클로 드 부조’ 포도밭에서도 시토회 수도자들이 실험적으로 포도 농사를 지어 기반을 닦았다. 당시 시토회에서 만든 와인은 맛있다고 정평이 났기에 나라에서 특혜를 주었다. 교황은 십일조를 면해줬고, 국왕은 와인 수송과 판매에 따른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시토회 수도자들은 부르고뉴를 넘어 프랑스 다른 지역과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도 진출해 와인을 전파했다. 영화 ‘장미의 이름’을 촬영한 곳으로 알려진 독일 에버바흐 수도원의 포도밭도 시토회 수도자들이 개척한 곳이다.
지금까지 13세기까지의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실토하자면 글머리에 언급한 샤르도네와 피노누아는 이때까지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두 품종 모두 14세기에나 언급이 되니 당시의 와인은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사실, 품종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일까. 다만, 사과꽃 필 무렵 중세 사람들 역시 무언가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4월은 그런 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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