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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 대하여

입력
2021.04.06 22:00
27면
제비꽃은 이름이 많다. 오랑캐꽃 말고도 땅에 붙어 낮은 키로 자란다고 해서 앉은뱅이꽃, 작고 귀여워서 병아리꽃, 반지를 만들어 논다고 해서 반지꽃, 꽃모양이 장수들이 씨름하는 것 같다 해서 장수꽃, 씨름꽃…. 영어 이름은 바이올렛(violet). 영어권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고 아예 보라색을 지칭하는 색 이름이 됐다. 요즘 도로변에 가장 흔하게 심어놓은 팬지는 서양의 삼색제비꽃이다. 꽃말은 색깔마다 다른데 '나를 생각해 주세요' '순진한 사랑' '겸양' 등이 있다. 국내 종류만 50종이 넘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제비꽃은 이름이 많다. 오랑캐꽃 말고도 땅에 붙어 낮은 키로 자란다고 해서 앉은뱅이꽃, 작고 귀여워서 병아리꽃, 반지를 만들어 논다고 해서 반지꽃, 꽃모양이 장수들이 씨름하는 것 같다 해서 장수꽃, 씨름꽃…. 영어 이름은 바이올렛(violet). 영어권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고 아예 보라색을 지칭하는 색 이름이 됐다. 요즘 도로변에 가장 흔하게 심어놓은 팬지는 서양의 삼색제비꽃이다. 꽃말은 색깔마다 다른데 '나를 생각해 주세요' '순진한 사랑' '겸양' 등이 있다. 국내 종류만 50종이 넘는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을은 하늘에서 오고 봄은 땅에서 온다. 나 어렸을 때, 봄은 이 꽃과 같이 땅에서부터 왔다. 산과 들과 마을에 지천이었다. 냉이 캐러 밭두렁에 나온 소녀들의 꽃반지가 되어준 꽃. 순이하고 분이하고 꽃싸움을 걸며 놀기도 했다.

도시에 살면서 이 꽃은 책갈피 속에 고이 접어둔 동심의 추억 속에 있는 꽃이 됐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의 양지바른 보도블록 갈라진 틈에서 보고 말았다. 수줍게 고개를 내민 진보라색 이 아이가 문득 눈에 밟혔다. 순간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이날 밤 TV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오래 잊었던 그 노래를 들었다.

이 꽃을 생각하면 먼저 이 시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 시 하나면 끝이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발견할 수 있을 거야//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사랑이란 그런 거야/사랑이란 그런 거야//봄은,/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그 사람 앞에는/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참 이상하지?/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안도현, '제비꽃에 대하여' 전문)

한국 포크계의 대부로 불린 음유시인 조동진을 좋아했다. 그가 1985년에 작사·작곡·노래한 '제비꽃'은 사회생활 초기 힘들 때 위안이 됐던 노래다. 그날 TV에서 함춘호의 기타 반주 하나에 기대 이 노래를 읊조린 장필순은 자신에게 평화를 준 인생노래였다고 말했다.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가곡 '제비꽃'은 괴테의 시에 붙인 곡이다. 나훈아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테스형'에서 뜬금없이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고 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삼월 삼짇날, 제비가 돌아올 때 핀다 하여 제비꽃이라고 한다. 춘궁기에 오랑캐가 자주 쳐들어올 때 피어서 오랑캐꽃이라고 불렸다.

제비꽃은 국민 애송시가 된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딱 맞는 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아담하면서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색깔은 볼수록 오묘하다 못해 도도하다. 그냥 보라, 그냥 자주가 아니다(흰색이나 노란색도 있다). 묘하게 신비스런 푸른빛을 띤 청자색(靑紫色), 남자색(藍紫色)이다.

그 긴 겨울을 용케 견디고 어느 풀꽃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제비꽃. 그 작은 놈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눈물 난다. 나의 나태한 눈, 무딘 감성, 더러운 욕망을 죽비로 내려치는 것만 같다.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쓸쓸한 날, 바라보는 제비꽃은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핀다. (나태주, '제비꽃1').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된다(정호승,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제비꽃은 그냥 보이지 않는다. 허리를 낮춰야만 내게 온다. 그래,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떠나가겠지만, 그 꽃을 볼 줄 아는 사람 앞에선 봄이 그냥 흘러가지 않으리라.



한기봉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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