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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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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짬을 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폭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품위를 유지했을 때만 이길 수 있습니다. 품위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영화 <그린 북> 중 셜리의 대사 그린>
9년 전 영국에 머물렀을 때 일입니다. 늦은 밤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취객이 지나가다가 정류장 기둥을 발로 차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어먹을 중국놈, 너희 나라로 돌아가.” 폭력적 언사에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취객이 어떤 해코지를 또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기분 나쁜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 미국에서 잇달아 들려옵니다. 한국계를 비롯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백인과 흑인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최근 캘리포니아주립대 혐오와 극단주의 연구센터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주요 16개 도시에서 혐오범죄는 7% 가량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범죄는 150% 가량 폭증했다고 합니다.
요즘 아시아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주문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미국에서 나고 자라거나 터전을 새로 일군 사람들에게 단지 아시아계라는 이유만으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저 무도한 억지는 문득 20년이 다 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2002)을 떠올리게 합니다.
‘갱스 오브 뉴욕’의 중심인물은 ‘인간 백정’ 빌(대니얼 데이 루이스)과 암스테르담(리어나도 디캐프리오)입니다. 영국계인 빌은 19세기 뉴욕 빈민가 ‘파이브 포인츠’의 지배자입니다. 폭력으로 사람들을 윽박질러 재산을 모으고, 권력과 향락을 누리는 악인입니다. 아일랜드계 지도자 발론(리암 니슨)이 빌의 폭압에 맞서려고 합니다. 그는 이민자들을 규합해 빌과 전투를 벌였다가 무참하게 살해됩니다. 발론의 아들 암스테르담이 16년 후 파이브 포인츠로 돌아와 복수를 꾀하면서 이야기는 본궤도에 오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빌입니다. 빌은 ‘원주민’(Native)임을 강조하며 이민자들을 공격하기 일쑤입니다. 빌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침략자인 이민자들이 미국을 건립한 원주민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단정합니다. 백인(앵글로색슨을 의미합니다)이 하루 40센트를, 흑인이 20센트를 받고 일하는데,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고작 1센트만 받고도 기꺼이 나서니 기존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뺏길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빌은 항구에 나가 배에서 내리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빌은 원주민을 자처하지만 과연 온당한 표현일까요. 뉴욕은 원래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렸습니다. 영국이 지배하기 전 네덜란드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17세기 두 차례 전쟁을 펼치면서 뉴암스테르담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뉴욕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인 뉴욕 월(Wall)가의 유래에서도 뉴암스테르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군이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벽(Wall)을 세웠던 곳이 월가입니다.
역사를 살피면 네덜란드인들이 빌 같은 영국계보다 먼저 살았던 원주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인에 앞서 진정한 ‘원주민’(Native American)이 존재했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순서로만 따진다면 과연 빌이 원주민을 자처하며 아일랜드계 등 이민자들을 공격할 수 있을까요. 빌 역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을 한 이민자의 후손인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언행입니다. 영화에선 북미 원주민의 조각상과 그림들을 언뜻언뜻 보여주면서 빌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에둘러 표현합니다. 빌에 맞서 싸우는 아일랜드계의 새 지도자 암스테르담은 이름만으로도 빌의 주장을 공박합니다.
빌은 집안 내력을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독립전쟁에서 영국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자신 같은 인물이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한 사람의 자손이니 여러 권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영화는 막 뉴욕에 도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국적 획득을 위해 곧바로 북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는 남북 전쟁 격화로 미 연방정부의 병력 수요가 절실하던 때입니다. 300달러를 낼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징집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미국인들이 새 이민자들을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빌은 나름 논리를 내세우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불과합니다. 빌은 아일랜드인의 태생적인 열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영국 옆에서 잠깐 볼 일을 봤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아일랜드라는 겁니다.
빌이 이민자를 공격하는 데에는 여러 현실적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이 많아지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은 지역 정치인 트위드(짐 브로드벤트)와 결탁해 여러 이권을 나누고 있는데, 파이브 포인츠에 아일랜드인이 유입되자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빌의 행태는 현대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 듯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늦게 정착한 이민자를 쫓아낼 수 없다고 ‘갱스 오브 뉴욕’은 말합니다. 빌은 아일랜드 전통 춤을 추는 흑인을 보며 “잡탕”이라고 비하하고 “문명은 붕괴하고 있다”고 단정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섞이고, 여러 문화가 융합된 미국이 19세기 이후 어떤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트위드는 새 이민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미래에 등을 돌리고 있네.” 아시아계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미래에 등을 돌리는 백인과 흑인이 늘어난다면 미국의 미래가 밝을 수 있을까요. ‘갱스 오브 뉴욕’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과거는 우리의 길을 밝히는 횃불이다.” ‘갱스 오브 뉴욕’이 19세기 뉴욕 이야기를 빌려 21세기 미국인에게 진정 하고 싶은 말 아닐까요.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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