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미나리'의 강력한 맞수... 떠돌이의 달달 씁쓸한 삶을 그리다

입력
2021.04.04 16:14
수정
2021.04.05 11:06
21면
구독

아카데미 작품상 등 6개 부문 후보 '노매드랜드'

펀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을 떠나 바퀴 위의 인생을 택한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여정이 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펀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을 떠나 바퀴 위의 인생을 택한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여정이 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미국 네바다주 소도시 엠파이어는 한때 부흥했다. 석고 산업이 젖줄이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인적 드문 곳이 됐고, 우편번호마저 없어졌다. 결혼과 함께 정착한 여성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일자리를 잃었다. 남편은 암 투병 끝에 숨졌다. 아이는 아예 없었다. 유령 도시에 남을 이유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펀이 바퀴 위의 삶을 택한 이유다.

첫 ‘여행지’는 아마존캠퍼포스(Camper Force)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거대 유통업체 아마존은 떠돌이 노년 하층민을 주목했다. 밴을 몰고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에게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단기 일자리를 제공했다. 계속 일하고 싶고, 갈 곳 없던 펀의 선택지로 적절했다.

펀은 캠퍼포스에서 사람들과 교유하고, 유랑민들의 정보를 얻는다. 따스한 애리조나주로 이동해 유랑민 공동체 생활을 한다. 물물교환을 하며 떠돌이 생활의 별미를 맛보고, 엇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힌다. 펀의 유랑 생활은 본격화된다. 펀이 만나는 사람들 중엔 스스로 유랑을 택한 이들이 적지 않다. 누구는 급작스레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보고 “마당에 요트를 세워둔 채” 죽고 싶지 않아 떠돈다. 누구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정착의 삶을 포기했다.

'노매드랜드'의 풍광은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는 낭만을 담지는 않는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의 풍광은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는 낭만을 담지는 않는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노매드랜드’는 펀의 여정 같은 일상을 따라간다. 길 위의 인생은 안온하지 않다. 강추위를 견뎌야 하고 신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함부로 주차를 할 수도 없다. 차 안에서나 야외에서 볼일을 해결해야 한다. 펀은 편치 않은 삶을 받아들이고 이내 즐긴다. 발길 닿는 곳이 곧 자기의 뜰이다. 대자연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자신은 “집이 없는(Homeless) 게 아니나 거주지가 없을(Houseless) 뿐”이라는 생각이 커진다.

펀과 함께하는 풍광은 아름답다. 캘리포니아 핸디우즈 국립공원, 사우스다코타의 배드랜드 등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이런 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로 덜 알려진 관광지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대자연이 자신의 뜰이 된다. 떠돌이 인생의 몇 안 되는 장점이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의자에 앉기만 하면 대자연이 자신의 뜰이 된다. 떠돌이 인생의 몇 안 되는 장점이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카메라는 펀의 삶을 그저 관조하듯 바라본다. 동정의 눈빛이 어리지도 않고, 동경의 시선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펀은 누구나처럼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인생을 살 뿐이다. 차로 떠돌며 세상을 주유하는 생활이 여느 사람과 다른 뿐이다. 펀은 아름답지만 무심한 풍경 속에서 그저 살아간다. 유랑족을 돕는 인물은 이런 말을 한다. “당신에게 답을 줄 수는 없군요… 다만 당신이 생활하면서 그 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물론 펀도 자신을 유랑으로 내몬 사회에 대한 불만을 내비친다. 부유한 언니를 찾아가 작은 도움을 요청할 때다. 형부와 그의 친구들은 부동산으로 부를 쌓았다. 이들이 “(금융위기로 집값이 폭락한) 2008년 집을 더 살 걸” 하며 아쉬움을 드러내자 펀은 반격한다. “사람들에게 전 재산도 모자라 빚까지 져서는 결국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하는 집을 사게 하는 게 옳은 일이야?” 광포한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힐난이다.

감독은 중국인 클로이 자오(39)다. 그는 10대 때 중국을 떠나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유랑인 셈이다. 착근하지 못하는(또는 않는) 삶에 대한 공감이 스크린에 스며 있는 이유다.

25일 열리는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재미동포 2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와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두고 다툰다. 이변이 없는 한 ‘노매드랜드’가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자오 감독은 이미 골든글로브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아시아계 여성 최초로 수상했다. 영화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15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