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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도시가 페소 대신 달러에 빠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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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달러에 미친 나라예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20대 카밀라(Camilla)는 2016년 베네수엘라를 떠나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페루, 칠레를 거쳐 아르헨티나에 왔다.
카밀라가 거쳐 온 경로는 베네수엘라 이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루트인데, 그 이용 인원이 2015년 8만9,000명에서 2017년 88만 명으로 10배나 증가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18년 8월 에콰도르와 페루가 국경을 닫았다. 신분증만 있으면 자유롭게 오고 갔는데 그때부터 여권을 보여줘야 지나갈 수 있는 길로 바뀌었다.
이는 베네수엘라에서 여권 만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을 이용해 이웃 나라들이 사실상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여권 발급에 수백 달러를 뒷돈으로 주고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사실상 여권 갖는 게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렵다.
나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더 황당한 이야길 듣기도 했다. 국경이 막히니 국경 수비대의 눈을 피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고, 그러다 보니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워져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온다는 것이다. 무려 7,300㎞에 이르는 엄청난 거리를.
어려움을 겨우 이겨내고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까지 와도 굴곡은 이어진다. 카밀라는 전전긍긍하다 겨우 카페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공식 이민 서류를 갖고 있지 않은 친구는 합법적으로 취직을 못 했고, 최악의 경우 성매매로 생계를 꾸린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함께 남미 경제를 이끄는 양대 산맥이다. 여기에 작지만 강한 국가로 우루과이와 칠레가 꼽힌다. 하지만 양국은 자원의 저주라 불릴 만큼 풍족한 자원에도 경제는 내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아르헨티나는 27년 만에 최고 인플레이션을 기록했는데 무려 47.6%였다.
자국 화폐인 페소 가치도 달러 기준으로 급락했는데, 내가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2018년 8, 9월 페소 가치는 하락 또 하락. 8월 1일에는 1달러 대비 27.52페소였던 가치가 같은 달 28일엔 31.34페소를 기록하며, 약 13% 떨어졌다.
당시 페소 환율은 8월 29일 33.99페소 → 8월 30일 37.59페소 → 8월 31일 36.85페소 → 9월 3일 37.39페소 → 9월 4일 38.88페소를 기록했다.
때마침 같은 시기에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던 나는 여행객 입장에서 페소 가치가 하락한 덕을 크게 봤다. 숙소 비용과 식비, 교통비 등 8월 이전에 갔더라면 써야만 했던 돈을 3분의 1 이상 아낀 것이다.
더 운이 좋았던 건 9월 4일 대국민 담화를 자청한 마우리시오 마크리(Macri) 대통령의 회견을 대통령궁 앞에서 아르헨티나 언론인들과 지켜볼 수 있었다.
이날 대통령은 끝없이 추락하는 국가 경제를 되살려 보겠다며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대통령은 정부 부처 10여 개를 통폐합해 절반으로 줄이고, 방만한 재정 지출을 27% 줄이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여기에 대통령의 입으로 '나쁜 세금'이라고 말하면서도, 위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곡물을 수출하는 기업에 1달러당 4페소를 과세하는 수출세를 부과한다고 했다. 페소 가치 하락으로 이익을 얻은 수출업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며 협조를 구한 것이다.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무거운 내용의 대통령 담화를 현장에서 함께 지켜본 이들이 크게 개의치 않아 했던 모습이다. 애초에 친 기업과 친 시장을 기치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고, 개혁 방안의 실현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8년 7월 1일부터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목적으로 경찰서 재편도 시도했다. 그래서 기존의 경찰서를 54개에서 43개로 줄였다고 한다. 경찰서가 총기 난사를 당하며 공격에 노출되면서도 재정 지출을 위한 조치가 강행됐다고 한다.
2018년 4월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라마탄자(LaMatanza) 경찰서에서는 마약 거래와 살인 혐의로 수감 중인 애인을 탈옥시키기 위해 19세 여성이 다른 공범과 함께 총기를 난사하며 습격한 사건이 있었단다.
이 사건으로 경찰관이 중태에 빠져 시민 불안이 커졌고, 비슷한 시기에 경찰이 공격을 당한 총기 사건은 몇 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치안 상태는 더 나빠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위험하다고 알려진 거리의 상점들은 자물쇠를 채워두고 장사를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간판도 없다. 불법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지만 아는 사람들만 문 앞에 가서 인기척을 하면 문을 조용히 열어주는 식으로 영업을 한다. 오토바이 절도는 흔한 일이며, 길가에 세워둔 차량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도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크리 정부는 이미 2018년 5월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용을 신청했다. 나는 아르헨티나가 IMF에 도와달라고 구조 신호를 보내는 단골손님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1958년 이후로 20여 차례나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으니까.
객관적으로 나라의 신용과 체력이 허약해져 가는데, 어째서인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기류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성적 위기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스위스에서 만났던 아르헨티나 출신 소피아를 다시 만났다. 소피아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한 달 동안의 유럽 여행을 마쳤다. 이후 구직 활동 중이었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5명은 멕시코로, 스페인과 미국으로 각각 10여 명이 향했다.
그러나 대개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그곳 역시 일자리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월마트는 문을 닫았고, 실업률은 35%에 이를 만큼 심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걷다 보면 '돌러돌러(달러)!! 깜비오!!' 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이른바 거리 환전상들이다. 1달러에 얼마냐고 묻자 계산기를 두드려보더니 37페소로 바꿔준다고 했다.
세계 여행을 하다 보면 환전상들은 보통 국경 지역에 있고, 시내에서는 환전소만 있다. 국경이 아닌 도심 길거리마다 넘치는 환전상들을 볼 수 있는 나라는 아르헨티나가 유일했다.
그 배경에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자국의 화폐 페소를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자국의 화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것. 숙소에서 결제할 때도 페소는 거부당하고 달러만 받는다고 했다.
이용료를 깎아주더라도 가격 하락 위험이 덜한 달러로 받아두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달러를 주는 내 손길을 반기며 정권이 다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집권한 정부가 성과를 내기는커녕 안 좋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죽어서도 살 수 있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사람은 세 번 죽는다고 정의했다. 꿈을 잃는 것이 첫 번째 죽음이요,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두 번째 죽음이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죽었을 때 비로소 세 번째 죽음이 완결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인이든 극악무도한 인물이든 역사 속에서 늘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도 산 사람들이 아닐까.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부의 부유한 지역인 레콜레타(Recoleta)엔 죽어서도 산 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 묘지로 몰려든다. 이유가 무엇일까.
언뜻 봐도 이렇게 비싼 땅에 묘지가 있다는 것이 이국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묘지 이전과 도시 개발이라는 유혹이 밀어닥쳤을 텐데 그런 움직임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묘지를 다 둘러보고 나서야 하게 됐다.
레콜레타 공동묘지 부지를 묘지로 결정한 것은 18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 아르헨티나 초대 대통령이 주도하고, 프로스페르가켈린이라는 프랑스인이 설계해서 만들어진 이 묘지는 그 이전까지 수도승들의 텃밭으로 사용되던 정원이었다고 한다.
묘지는 비석이 아닌 수많은 조각들과 전통 양식의 소형 건축물 등이 주를 이루고 있어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수많은 묘지 중 70여 개의 묘는 예술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도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대부분이 가족묘 형식인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역대 대통령과 가족, 명문가의 인사들이 누워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국모로 기억되는 전 영부인 에바 페론도 잠들어 있다. 에바 페론의 드라마 같은 역정과 삶의 궤적은 1997년 영화 '에비타(Evita)'가 미국에서 개봉될 정도로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줬다.
에바 페론은 가난한 시골 농부의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성장한다. 나이트클럽의 댄서를 시작으로 출세를 향한 야망을 키워나가던 에바 페론은 성우를 거쳐 영화배우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나간다.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유명세를 떨치는 연예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1944년 아르헨티나의 지진으로 인해 난민구제모금 기관에서 주최한 모임에 나갔다가 당시의 노동부 장관인 후안 페론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후 에바 페론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우여곡절 끝에 1945년 민중 혁명 끝에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서 복지 정책을 확대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던 영부인 에바 페론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소외와 멸시받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에바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자들과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현실에 맞서며 해결에 노력을 다한다.
9년 동안 이어진 헌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에바 페론은 국민들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추대되지만 암 말기 선고를 받고 1952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플레이션, 실업률 상승 등을 막지 못한 남편 후안 페론은 쿠데타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에바 페론의 시신 역시 도난당해 해외를 떠돌다가 현재의 레콜레타 묘지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내가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 편이었지만, 직접 묘지를 찾은 당일에만도 많은 이들이 묘지를 찾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 추모를 받기에 그의 묘지 앞은 늘 새로운 꽃다발이 놓인다. 한때 선진국 가도를 달리며, 많은 이들의 이민의 목표 국가였던 아르헨티나.
시간이 흘러 위기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이들의 낙천성이, 흘러들어오는 베네수엘라 사람들과도 잘 공존할 수 있을까.
수출세를 부과하는 등 긴축 재정에 나섰던 마크리 정부는 경제난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실각하고 2019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새로 취임했다.
2019년 8월 기준 페소는 1달러에 43.20으로 더 떨어졌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공식 환율은 91.63을 기록하고 있다. 암 시장의 달러는 140페소.
대체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문득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어린이가 돈을 벌러 떠난 엄마를 찾는다는 내용이 줄거리였다. 이때 돈을 벌기 위해 엄마가 간 곳이 아르헨티나일 정도로 부유한 국가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브루마블이라는 게임에도 등장하는 부유한 도시다.
직접 찾아간 그곳은 치안문제, 실업문제, 복지문제, 교육문제가 심화되었고, 선거 때마다 대통령을 바꿔보지만 어디로 가도 쉽진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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