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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오더가 뭔뜻?" 야속한 키오스크, 어르신 잘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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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드아웃? 셀프오더? 뭔 말인지 당최 알 수 있어야 뭘 누르든가 하지. 그런데 뭐,어쩌겠어, 모르는 게 죄인걸…”
실습용 키오스크(무인 주문기) 앞에 모여든 노인들 사이에서 자조 섞인 탄식이 쏟아진다. 화면을 건드리자 등장하는 다섯 글자, ‘테이크 아웃’부터 가로막힌다. 이어 ‘사이즈업’ ‘더블샷’까지, 표기는 한글이나 이들 눈엔 ‘외계어’나 다름없다. 넘겨도 넘겨도 끝없이 나오는 메뉴판, '결제'까지 많게는 10단계에 이르는 번거로움에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아유, 나 너무 떨려서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남이 할 땐 쉬워 보였는데 내가 하려니 왜 이리 매번 새로운지…” 60대 이상 노인들을 위해 서울시립은평노인종합복지관이 운영 중인 ‘어르신 디지털 기기 활용 수업’의 지난달 22일 풍경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일상의 대부분을 급속하게 ‘디지털화’했다. 불과 1년 만에 음식 주문은 물론 승차권 발권, 금융업무, 민원처리, 병원 접수까지 ‘기계’의 영역이 돼 버렸다. 그 사이 ‘느린' 이들의 존재는 잊힌 지 오래다. 매일 쓰는 스마트폰이 여전히 ‘내 것’ 같지 않은 노인들에겐 어딜 가나 불쑥 눈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기계가 야속하다.
'배워도 그때뿐'이다 보니 자책만 는다. “다 내가 늙어서 그렇지 뭐. 배우는 속도도, 반응 속도도 자꾸 떨어지니까.” 과연 노인들의 '학습 능력’만이 문제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고령층의 사용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시스템 설계’에 있다.
“기자 양반, ‘디바이스(Device)’가 대체 무슨 뜻이오? 아, 그 뒤에 붙은 ‘케어(Care)’는 알겠어. 병원에서 많이 들어봤거든. ‘도와준다’는 뜻이잖아. 근데 ‘디바이스’는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다는 말이지.”
이날 수업을 듣던 윤윤중(79)씨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려고 왔는데 영어 단어부터 외워야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수강생들의 강의 노트엔 각종 외래어와 그 뜻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핫스팟 - 인터넷을 같이 쓰는 기능' ‘블루투스 - 선 없이 기계와 기계를 연결하는 것' 등등. 단어 뜻을 잊어버릴 때마다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불필요한 외래어는 키오스크 화면에도 넘친다. ‘셀프 오더 타임’ ‘테이크 아웃’ ‘솔드 아웃’ 등 우리말로 충분히 풀어쓸 수 있는 단어들까지 외래어 그대로 표기돼 있다. “‘더블 샷’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어요. 오늘 수업에서 처음 알았지 뭐야. 커피를 두 배로 진하게 타주는 거라면서.” 용량을 선택하는 화면에선 'Small(소)' 'Medium(중)' 'Large(대)'를 알파벳으로 표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수업을 진행한 정원희 강사는 “‘세트(set)’의 뜻을 모르다 보니, 세트 상품과 단품을 구분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분도 많다”며 “대부분 외래어를 가장 큰 장벽으로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취재진은 외래어를 우리말로 풀어서 표기한 화면 모형을 제작해 수강생들에게 보여줬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옳지" "저거지" 하는 추임새가 쏟아졌다. ‘테이크 아웃’을 ‘포장 주문’으로 바꾸고, 글자 크기를 대폭 키운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 모형 화면에는 “시원시원하다” “보기 좋다”는 반응이 나왔다. “‘디스플레이’가 ‘화면’이라는 뜻이었구먼… 애초에 저렇게 써 주면 편했을 것을…” “큼직큼직하니 좋네. 이 정도만 되면 젊은이 도움을 안 받아도 되겠어." 수강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강의실에 퍼졌다.
“화면에 막 버튼이 수도 없이 많이 뜨니까 식은땀이 날 때가 많아요.” 최근 키오스크 사용법 배우기에 여념이 없는 강명숙(71)씨는 '실전'에 나설 때마다 매번 ‘중도 포기’하고 만다. 불고기버거 하나를 주문하는데, 사이드 메뉴부터 음료, 크기, 포인트 적립 여부까지 눌러야 할 버튼이 너무 많다. 반응 속도가 느린 노인들에겐 ‘선택 단계’가 많아질수록 체감 난도가 높아진다.
고령층을 위한 키오스크 디자인을 연구한 한국디자인학회와 한국HCI학회 등의 자료에 따르면, 한 화면에 표시되는 선택지가 너무 많은 경우 정보 처리 속도가 떨어지는 디지털 취약계층은 심리적 초조함을 느낀다. 대안은 ‘간편모드’다. 한 화면 안에 보이는 메뉴의 수를 최소화하고, 글자 크기를 확 키우는 한편 글자와 배경 간의 대비를 통해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메뉴가 장바구니에 담길 때마다 크고 선명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식으로, 조작에 따른 피드백을 확실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 강사는 “어르신들이 메뉴 버튼을 여러 번 터치하는 바람에, 같은 햄버거를 8개씩 받아 드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다”며 “단계별 진행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단순한 화면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계 활용법을 배우러 온 노인 대다수는 쉽게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해한다. ‘당장 죽을 게 아닌 이상 필사적으로 배우겠다’며 결의에 찼다가도 ‘이렇게 영영 뒤처져 버릴까’ 강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외래어 남발을 불평하기보다 ‘모르는 게 죄’라며 스스로를 탓하고 만다.
평소 50대 어머니의 스마트폰 사용을 자주 돕는다는 유모(34)씨는 “노인들이 남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며 “문제는 고령층의 사용자 경험(UI)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디자인인데, 노인들이 패배감을 느끼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취약계층의 편의를 두루 고려한 ‘착한' 디자인은 어렵지 않다. 외래어는 풀어쓴 순우리말로, 번잡한 화면은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미적 감각보단 ‘가독성’을 고려한 디자인으로 장벽을 허물면 된다. 그때 비로소 노인들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특정 계층’만을 위한 기술에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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