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 후 첫 수업은 한문 시간이었습니다. 1번부터 앞으로 나가 칠판에 자기 이름을 한자로 써야 했는데 대부분 쓰지 못했고 그 벌로 매를 맞았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저는 꾀를 냈습니다. 마침 내가 아는 한자가 있어서 날조한 거죠. 李正毛(이정모)라고 말입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毛(모) 때문에 들통이 났고 괘씸죄로 첫날부터 호되게 당했죠. 그날 제 심정은 이랬습니다. “우씨, 가르치지도 않고 모른다고 때리면 어떻게 해! 삐뚤어질 테다.”
좋은 선생님이 계실 땐 한자가 재밌었습니다. 제게 좋은 선생님이란 때리지 않고 재밌는 이야기로 수업을 이끄는 분입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운 矛盾(모순) 같은 겁니다. 글자는 단지 ‘창과 방패’를 뜻하지만 그 뒤에 있는 이야기가 재밌죠. 창과 방패 장수가 “이 창은 아무리 튼튼한 방패도 뚫어버리는 괴력의 창입니다. 그리고 이 방패는 세상의 모든 창을 능히 막을 수 있죠”라며 떠벌일 때 한 구경꾼이 “그러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으면 어떻게 되오?”라고 따집니다. 모순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사용하는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은 모순투성이입니다. 저는 한글만 쓰는 데 찬성하지만 한자어를 좋아하거든요.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모순이 더 드러나는 법이죠.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둔 요즘 자주 목격합니다.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코로나 백신 위험하잖아. 맞고 죽은 사람도 있대. 난 안 맞을 거야”라고요. 아니라고 한참 설명했더니 그 친구는 채 10분이 지나지도 않아 대뜸 “도대체 정부가 하는 게 뭐야? 백신 확보도 못 하고. K-방역이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며 흥분합니다. 둘 중 하나만 하면 좋겠습니다.
백신 접종률이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칠레, 영국, 미국 순입니다. 낮은 나라는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뉴질랜드, 태국, 베트남, 대만 순입니다. 보이십니까? 접종률이 높은 나라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세계 평균 이상으로 높은 나라이고, 접종률이 낮은 나라는 방역이 잘되어 피해가 적은 나라죠. 전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라에 백신이 먼저 공급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같습니다.
‘K-방역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봤습니다. “아니, 왜 방역을 잘해서 백신 접종이 늦어지게 하는 거야!” 정도의 투정이죠. 방역의 목적이 상태를 방치했다가 백신을 빨리 맞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식이라면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노벨상을 받아야 합니다. 백신에 대한 내 친구의 태도는 그야말로 모순입니다.
似而非(사이비) 역시 윤리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재밌는 한자입니다. ‘비슷하지만 아니다’라는 뜻이죠. 이 한자어가 재밌는 건 그 뒤에 공자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향원이라는 이름난 선비가 있었습니다.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흠잡을 데 없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시류에는 살짝 편승하는 사람이죠. 공자는 향원을 두고 惡似而非者(오사이비자)라고 했습니다. 사이비, 즉 비슷하지만 아닌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이죠.
백신을 두고 전문가와 다르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가끔 돋보입니다. 이분들이 평소에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분들이라는 게 문제죠. 뛰어난 면역학자도 있고 한국 사회에 날 선 비판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던 칼럼니스트도 있습니다. 모순과 사이비의 또 다른 용례가 될 것 같습니다. 참, 제 이름은 한자로 李庭模(이정모)입니다. 선생님, 이걸 배우지 않고 어떻게 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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