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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불가피론과 그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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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5일 저녁 윤석열 검사는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 자택을 찾아갔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이었던 윤 검사는 국정원 직원 체포와 압수수색 계획을 보고하며 결재를 요청했다. 조 지검장이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결재라인을 통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윤 검사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윤 검사는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조 지검장을 모시고 이번 사건을 끌고 나가긴 어렵다고 생각했다”며 불가피성을 언급했다. 그는 지시 불이행으로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았지만, 상사를 희생양 삼아 ‘강직한 검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댓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를 법정에 세운 윤 검사는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그럴듯한 대의명분과 능수능란한 언론플레이가 먹혀 들면서 적법 절차와 인권이란 말은 한동안 서초동에서 들리지 않았다.
윤 검사는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해 출세 길에 올랐지만,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그의 망신주기 수사에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세월호 유족 사찰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이재수 전 국군기무사령관이 목숨을 끊었고, 국정원 댓글 수사방해 의혹과 관련해선 변창훈 전 서울고검 검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재수 전 사령관의 경우 구속영장도 안 나왔는데 수갑 찬 모습이 언론에 노출된 직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람들이 잇따라 죽어나갔지만, 검찰 주변에선 “대의를 위해 이런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윤 검사의 불가피론은 그의 ‘외골수 정의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신의 결정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나친 탓인지, 그는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은 거칠게 비난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면 “법과 원칙 이외에 다른 요소로 결정하는 것 같다”고 말하고, “이런 수사는 하지 말라는 모양”이라며 힐난했다. 윤 검사가 주도한 ‘사법농단’ 수사로 기소된 법관들이 6연속 무죄가 나왔지만, 그가 속했던 검찰은 성찰은커녕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로 몰아갔다.
윤 검사가 진두 지휘한 수사는 ‘의외로’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도 많다. 그는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기업비리 수사의 첫 타깃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택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검찰은 하성용 전 대표에 대해 분식회계와 횡령 등 11가지 혐의를 적용해 구속한 뒤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최근 대부분 혐의가 무죄가 난 가운데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문재인 정부 핵심인사에 대한 첫 수사라는 상징성 탓에 관심을 끌었던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수사도 용두사미로 마무리됐다. 검찰은 무려 8년 6월을 구형했지만, 실형은커녕 대법원에서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누군가를 10개 혐의로 기소했는데 한두 개 혐의만 유죄로 나왔다면 이것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윤 검사는 아마 이렇게 답변할 수도 있겠다. “당시엔 기소가 불가피했다. 무죄를 때린 법원이 문제다. 어쨌든 유죄는 나오지 않았냐”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불가피론을 내세우는 사람은 좀처럼 사과를 하지 않는다. 불가피했다고 설명하면 모든 결정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남 때려 잡으면서 그걸 정의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 사과란 말은 더더욱 낯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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