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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 인정에 목말랐던 36세 청년 신춘호, 오기로 키워낸 농심

입력
2021.03.28 16:37
수정
2021.03.28 18:27
2면

라면 사업 두고 故 신격호 롯데 회장과 갈등?
형과의 악연 "반드시 성공하겠다" 동력으로?
평생 강조한 '품질경영'…세계 입맛도 사로잡아

고 신격호(왼쪽)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27일 별세한 고 신춘호 농심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농심 제공

고 신격호(왼쪽)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27일 별세한 고 신춘호 농심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농심 제공

"신격호 회장과 갈등의 골이 깊었던 동생이다."

재계 관계자들이 고(故) 신춘호 농심 회장의 가족사에 대해 한결같이 떠올린 첫 기억이다. 유난히 대물림된 '형제의 난'으로 갈등의 골도 깊었던 게 롯데가(家)다. 신춘호 회장이 평생 동안 일군 농심 역시 롯데그룹 제왕이었던 그의 맏형 고 신격호 회장과의 갈등에서 잉태됐다. 신춘호 회장과 신격호 회장은 50여 년 전 틀어지기 시작, 수십 년간 인연을 끊고 살았다. 지난해 1월 신격호 회장이 별세하고 이달 27일 신춘호 회장도 영면에 들면서 두 형제는 끝내 앙금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감히 롯데 이름을" 호통에 탄생한 농심

1966년 준공된 농심의 첫 라면 생산 기지인 서울 대방공장의 초창기 모습. 농심 제공

1966년 준공된 농심의 첫 라면 생산 기지인 서울 대방공장의 초창기 모습. 농심 제공

껌으로 시작해 롯데그룹을 재계 서열 5위까지 올려놓은 신격호 회장을 신춘호 회장이 옆에서 돕던 시절도 있었다. 신춘호 회장은 30대 중반까지는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자기 사업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신춘호 회장이 라면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면서 형과의 우애는 틀어졌다.

신춘호 회장이 36세였던 1965년, 롯데공업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신격호 회장은 탐탁지 않아 했다. 라면의 시장성을 저평가한 신격호 회장은 동생 사업에 강력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둘의 관계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신격호 회장이 "감히 롯데라는 이름을 쓰냐"며 롯데 브랜드를 쓰지 못하게 했다. 1978년 신춘호 회장은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인 농심으로 사명을 바꿨고, 이 사태로 형제는 의절했다. 신춘호 회장이 롯데가에서 완전히 발을 뺀 시점도 이때다.

1978년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 사명을 변경하는 주주총회에서 단상에 오른 신춘호 회장의 모습. 농심 제공

1978년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 사명을 변경하는 주주총회에서 단상에 오른 신춘호 회장의 모습. 농심 제공

재계 관계자는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면을 파는 것에 형은 감정이 상했고, 신춘호 회장도 나름 지원해 주지 않는 형과 골이 깊어져 그 이후 교류하지 않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끝내 마주하지 않은 형제

지난해 1월 19일 오후 8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이자 명예회장 장례식에서 절을 하고 있는 (단상 향해 오른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당시 신춘호 농심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롯데그룹 제공

지난해 1월 19일 오후 8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이자 명예회장 장례식에서 절을 하고 있는 (단상 향해 오른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당시 신춘호 농심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롯데그룹 제공

반목의 세월은 길었다. 가족 행사에 두 형제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부친 제사에 신춘호 회장이 참석하지 않는가 하면, 신춘호 회장 칠순에도 신격호 회장은 불참했다.

지난해 1월 19일 타계한 신격호 회장의 장례식장에도 막냇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 여동생 신정숙씨 등 다른 형제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신춘호 회장은 끝내 찾지 않았다. 본인 대신 두 아들 신동원 농심 부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을 빈소에 보냈다.

"성공하겠다" 오기가 '품질경영' DNA로

1982년 신춘호(가운데) 회장이 농심 임직원들과 함께 당시 신제품이었던 육개장사발면을 시식하고 있다. 농심 제공

1982년 신춘호(가운데) 회장이 농심 임직원들과 함께 당시 신제품이었던 육개장사발면을 시식하고 있다. 농심 제공

형과 관계를 정리한 불행한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춘호 회장에겐 사업적 성공에 대한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신춘호 회장은 가족과 아주 가까운 지인들만 초청해 연 고희연 잔치에서 나눠준 자서전을 통해 '형이 안 된다고 하는 사업을 내가 성공시켜 보겠다. 내 방식대로 사업을 추진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형과의 갈등 당시 심정을 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라면 시장은 녹록지 않았다. 삼양식품이 점유율 80% 이상으로 부동의 1위를 고수한 가운데 풍년라면과 닭표라면 등 7, 8개 업체가 난립하던 상태였다. 신격호 회장이 "포화된 라면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어선 승산이 없다"고 반대했던 배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적 성공에 대한 신춘호 회장의 열망은 강렬했다. 포화된 라면 시장에서 차별화된 포인트를 '품질경영'으로 진단한 신춘호 회장은 기술개발과 설비확충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첫 라면을 생산한 해인 1965년 라면연구소를 세웠고, 국내 라면이 닭고기 육수를 쓰던 시기에 한국인 입맛에 맞는 소고기장국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라면을 고민한 끝에 1970년 소고기라면으로 시장에 안착했다.

생전에 '라면은 면에서 수프맛 중심으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신춘호 회장이 1980년 수프 설비 조사차 유럽 출장을 갔던 모습. 농심 제공

생전에 '라면은 면에서 수프맛 중심으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신춘호 회장이 1980년 수프 설비 조사차 유럽 출장을 갔던 모습. 농심 제공

이후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안성탕면 등이 잇따라 성공하며 1985년 점유율 42%로 1위를 꿰찼다. 이듬해인 1986년 출시한 신라면의 대성공과 함께 인기 요인 분석과 품질 개선을 기반으로 히트작을 장수 브랜드로 키우는 집중관리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신라면은 단일상품 기준 1991년 삼양라면을 제치고 1위에 오른 뒤 30년 넘게 단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

농심에 따르면 신춘호 회장은 평소에도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라도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 것을 강조해 왔다.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라며 그의 주도 아래 신라면 25주년을 맞아 출시한 리뉴얼 제품 신라면블랙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 선정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지막 업무지시도 '품질제일'

신춘호 회장은 '거짓 없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 속의 농심을 키워라'는 말을 마지막 업무지시로 남겼다. 농심 관계자는 "50여 년간 강조해 온 품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짚으면서 물건 파는 것에 그치지 말고 체계적 전략을 세우라고 하셨다"며 "식품 맛과 품질을 높여야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다는 당부의 말씀이었다"고 전했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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