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라렌·벤츠 '거지차' 폭언…"아이에겐 자아 짓밟히는 경험"

입력
2021.03.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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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심리 전문가가 본 부산 맥라렌·벤츠 논란
"신 같은 부모가 폭력에 노출…극단적 공포로"
"아이에게 불안장애 유발하는 트라우마 될 수도"
"화가 많은 사회, 단편적 사고로 분노 표출만 집중"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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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도로 위에서 시비가 붙은 상대방 차량 운전자 자녀에게 "거지차 타는 부모처럼 되라"는 폭언을 한 맥라렌·메르세데스-벤츠 운전자가 국민적 공분을 샀다. 분노의 화살이 힘없는 어린아이에게로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모가 지켜보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는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차량 진입 문제로 시비가 벌어진 게 화근이 됐다. 값비싼 고급 차량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20·30대로 젊은 반면, 상대방 운전자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차를 몬 50대였다.

주목할 부분은 ①아이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과 ②값비싼 차를 상대방을 괄시하는 수단으로 내세웠다는 부분이다. 이 논란을 지켜본 국민이 분노하게 만든 것도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관련 기사: '해운대 맥라렌' 운전자의 '똥차' 막말 논란은 진실게임으로?>

26일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아동·심리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일이 벌어질 경우 아이들은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겪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맥라렌·벤츠 운전자는 홧김에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성장 과정 내내 자신을 괴롭힐 '대형 사건'이 된다는 진단이다. <관련 기사: "거지차 타는 너네 부모 부끄럽다"… 맥라렌 이어 '벤츠 논란' 등장>

무엇보다 자아 형성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심각해지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아이들을 상대로 한 돌발적이고 공격적 언동은 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당하는 부모 보며 '세상은 나를 못 지켜준다' 좌절할 수도"

부산 해운대구 일대에서 맥라렌 차주에게 보복 운전과 폭언을 당했다는 미니 차주가 22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개한 당시 사진. 사진에는 한 남성이 미니 차량 선루프 사이로 말하는 장면이 담겼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부산 해운대구 일대에서 맥라렌 차주에게 보복 운전과 폭언을 당했다는 미니 차주가 22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개한 당시 사진. 사진에는 한 남성이 미니 차량 선루프 사이로 말하는 장면이 담겼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전문가들은 이런 일을 겪은 어른들은 잠시 감정적으로 폭발한 해프닝으로 여길지 몰라도 아이들은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게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세계와 자아가 무참히 짓밟히고 무너진 경험을 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맥라렌 운전자와 시비가 붙은 미니 운전자와, 벤츠 운전자에게 폭언을 들은 쉐보레 윈스톰 운전자 모두 커뮤니티에 "아이가 심리치료와 함께 약물치료도 받고 있다"며 "아이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배승민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아이들이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돼 안정감이 약해지고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조금이라도 불안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라면 불안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그런 기질이 없더라도 이 사건을 계기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부모가 폭언을 듣는 장면을 지켜본 것도 문제다.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이의 특성 때문이다. 아이에게 절대적 존재인 부모가 당할 경우 아이는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김석웅 심리건강연구소 소장"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울이자 세계관의 전체를 차지하는 부모가 위협받는 건 자신의 세계가 위협받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이 많고 늘 경계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안은 무방비...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위험하다 느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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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교수도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부모가 있음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공포감이 더 클 수 있다"며 "부모가 모르는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고 부모의 대처가 별 효과를 얻지 못하는 걸 보면 세상에는 안전 지대가 없다는 공포감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란 공간의 특수성도 살펴봐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자동차는 닫힌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다. 피하고 싶은 일이 벌어져도 도망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실제로 현대해상 교통기후환경연구소가 서울시 초등학생 533명과 학부모 2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아이들이 어른보다 난폭 운전을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이 더 높았다.

난폭 운전 경험을 묻는 질문에 "있다"고 답한 학부모는 20%였지만, 초등학생들은 32%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현대해상 연구소는 "자녀들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정도가 부모들의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밝혔다.

최이문 경찰대 교수"자동차 안에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자동차 안은 부모가 아이한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차 안에서 겪으면 더 크게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시비 휘말려도 아이 있을 때 대처 신중해야"

부산 해운대구 일대에서 맥라렌 차주에게 보복 운전과 폭언을 당했다는 미니 차주가 22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개한 당시 사진. 사진에는 한 남성이 맥라렌을 다시 타는 장면이 담겼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부산 해운대구 일대에서 맥라렌 차주에게 보복 운전과 폭언을 당했다는 미니 차주가 22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개한 당시 사진. 사진에는 한 남성이 맥라렌을 다시 타는 장면이 담겼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맥라렌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맥라렌 차주 역시 상대방인 미니 차주가 보복 운전 및 욕설을 했다고 주장해왔던 대목이다.

사실이라면 이 역시 아이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레온 제임스(Leon James) 하와이대 교수는 외신 인터뷰에서 "나는 난폭 운전자의 뒷자리를 '난폭 운전 유치원'이라고 부른다"면서 "차에서 분노를 표출하면 아이들이 이를 모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아이는 부모를 통해 세상을 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폭력적 대처 방법이 아이에게 은연 중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사건을 재해석하게 되는데, 세상을 대처하는 방법을 선택할 때 부모의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불안감 표현 서툰 아이들, 세심하게 살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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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런 일을 겪은 아이가 있다면 부모가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가 크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난일을 떠올리고 나쁜 쪽으로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자칫 가족 간 위계가 흔들려 가정에서 불안정한 심리를 보일 수 있는데,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며 "각별한 관심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필요하다면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도 "부모는 (이번 일이) 억울하고 짜증나는 일로 여길 수 있지만, 아이는 이걸 풀어낼 능력이나 경험이 없다"며 "아이 수준에 맞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 주고 우리 가족에겐 문제가 없다는 걸 잘 얘기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지 않게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차감'이란 말 생겨…그릇되게 표출하는 허영심"

23일 자동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지난달 23일 메르세데스-벤츠 차량 운전자에게 폭언과 욕설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벤츠 차량 운전자가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욕은 물론 인격 비하 발언까지 했다고 적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23일 자동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지난달 23일 메르세데스-벤츠 차량 운전자에게 폭언과 욕설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벤츠 차량 운전자가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욕은 물론 인격 비하 발언까지 했다고 적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맥라렌과 벤츠 운전자는 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분노가 쌓여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이를 풀 데가 없다는 게 문제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사회 가치관이 물질중심적으로 바뀌면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돈으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 분노를 푸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경쟁 사회가 심할수록 지치다 보니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정하게 된다. 그만큼 분노가 많아지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평가했다.

김 소장은 "언제부턴가 '하차감'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비싼 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는 표현"이라며 "허영이나 자기과시를 잘못된 방향으로 드러내고 비싼 차로 계급을 나누려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 역시 "자동차 값에 따라 권력이 서열화되는 잘못된 인식이 생겼다. 비싼 차를 타면 윤리 의식쯤은 낮아도 괜찮다는 이상한 사고가 발현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여유 없는 각박한 사회 분위기 탓에 단편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이번 논란을 불러 왔다고 볼 수 있다.

김 소장은 "마음에 여유가 있고 안정감이 있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복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서 "심리적 여유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입체적 사고를 못 한다. 자신이 무시받았다는 생각에만 몰두해 분노를 쏟아낸다"고 말했다.

류호 기자
장윤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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