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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정치, 정치의 격조

입력
2021.03.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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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여왕의 결혼식 축복

왕실 스캔들이 불거질 때면 누구보다 속을 끓이는 게 엘리자베스 여왕일 것이다. 그는 왕좌를 지키고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로이터 연합뉴스.

왕실 스캔들이 불거질 때면 누구보다 속을 끓이는 게 엘리자베스 여왕일 것이다. 그는 왕좌를 지키고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2년 3월 23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시 타운홀에서 열린 한 무명 커플의 결혼식장에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배우자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 등 VIP들이 들이닥쳤다. 여왕과 왕족들은 미용사인 신부 프랜시스(Frances, 당시 44세)와 미용품업체 운영자인 신랑 존 캐닝(John Canning·48)을 이름까지 기억해 부르며 축하하고, 편한 담소를 나눈 뒤 떠났다.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 즉 즉위 60주년이던 해였고, 6월 공식 행사 전에 영국 주요 도시와 영연방 순방 일정으로 버킹엄궁이 무척 분주하던 때였다. 예비 부부는 예식 당일 여왕이 맨체스터 시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반쯤 장난으로(tongue in cheek)' 청첩장을 보냈고, 결혼 준비로 바빠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고 한다. 예식 며칠 전 신부는 '여왕이 흔쾌히 참석하시기로 했다'는 왕실 비서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래도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오찬 일정을 마친 여왕 내외는 후속 스케줄을 늦춰 그 약속을 지켰고, 하객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프랜시스는 "약간 두렵고 황홀했다"며 "잊지 못할 결혼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버킹엉궁은 여왕의 그 이례적 동정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전통시장을 찾아 어묵을 물고 사진을 찍어대는 한국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품위 있는 그의 '정치'에 영국 시민들은 여왕의 사려 깊음과 왕실의 존재감을 새삼 환기했고, 6월 텔레그래프 여론조사에서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35% 지지율로 '역대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꼽혔다.

왕실 스캔들이 불거질 때마다 가장 속을 끓이는 게 여왕일 테다. 군주제 폐지 여론 때문이다. 세금으로 충당되는 막대한 왕실 경비, 찰스-다이애나의 이혼과 비극, 해리 왕자의 나치 제복 코스튬 파티, 최근 해리왕자 부부가 제기한 인종차별 이슈…. 여왕의 최대 임무는 군주로서의 상징적 역할 외에 자기 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물려주는 일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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