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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만 하다 떠난 우리 엄마"… 애틀랜타 참사 희생자들 비통한 사연

입력
2021.03.20 21:00
수정
2021.03.21 19: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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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희생자들 가족 부양 위해 스파업소 근무
희생자 아들 위한 모금 사이트에 온정의 손길

미국 애틀랜타 총격사건 현장에 놓인 조화와 애도 메시지. 애틀랜타=AP 연합뉴스

미국 애틀랜타 총격사건 현장에 놓인 조화와 애도 메시지. 애틀랜타=AP 연합뉴스

“엄마는 우리를 위해 일만 했어요.” 가까운 친척도 없이 가족이라곤 엄마와 두 아들, 단 셋뿐이었는데 이젠 두 형제만 이 세상에 외로이 남겨졌다. 힘겹게 가꿔 온 소박한 일상도, 하루하루 여물어 가던 행복한 미래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엄마는 우리가 자신을 걱정하길 바라지 않았어요.” 장례식에서 쓸 영정사진을 고르며 형제는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평생 고생만 했던 엄마의 빈자리가 가슴에 사무친다.

1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州)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연쇄 총격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속속 전해지며 비통함을 더하고 있다. 이날 스파업소 세 곳에서 벌어진 총격으로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계 여성 6명 등 총 8명이 숨졌다. 19일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한 엄마이자 따뜻한 이웃이었다. 범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시아계 이민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스러진 것이다.

유일한 한국 국적 희생자인 현정 그랜트(한국이름 김현정ㆍ51)씨는 미국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워낸 씩씩한 싱글맘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의 학비와 주택 임대료 등을 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다. 그랜트씨는 차가 없어서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주로 직장인 스파업소나 근처 친구 집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매일 밤 퇴근 후에는 아들들과 통화하며 하루 일과를 나누곤 했다.

형제가 엄마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건 사건 전날 밤이었다. 첫째 아들 랜디 박(22)씨는 “엄마가 잘 지내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셨다”며 “‘굿 나잇’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슬퍼했다. 둘째 아들 에릭 박(20)씨는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생각난다”며 “엄마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내 꿈을 늘 응원해 주셨다”고 추억을 꺼내놓았다. 형제는 사건 당일 밤까지도 엄마의 사망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스파업소 직원 딸에게서 총격사건을 전해 들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이 뉴스에서 그랜트씨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한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연쇄 총격사건 현장 중 한 곳인 스파업체 '골드스파' 앞에서 19일 현지 한인들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애틀랜타=EPA 연합뉴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연쇄 총격사건 현장 중 한 곳인 스파업체 '골드스파' 앞에서 19일 현지 한인들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애틀랜타=EPA 연합뉴스

희생자 중에는 그랜트씨의 동료 김순자(69)씨와 박순정(74)씨도 있다. 김씨 가족들은 김씨를 취미로 라인댄스를 즐기던 유쾌한 할머니로 기억한다. 김씨는 더 나은 삶과 교육 기회를 찾아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가족들은 “우리는 평범한 미국 가정이었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비통해했다. 최고령 희생자인 박씨는 뉴욕에서 애틀랜타로 이주한 뒤 스파업소에서 일해 왔다. 박씨의 사위는 “고인이 뉴욕과 뉴저지에 있는 가족들과도 아주 잘 지냈다”고 전했다.

맞은편 스파업소에선 유영애(63)씨가 희생됐다. 이곳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실직했던 유씨가 새로 구한 일자리였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1970년대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씨는 1982년 이혼한 뒤에도 두 아들을 위해 꿋꿋이 삶을 꾸렸다. 전 남편 맥 피터슨씨는 “그녀는 좋은 엄마였고 항상 아이들을 위해 살았다”며 애써 슬픔을 감췄다.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에 각지에서 온정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그랜트씨의 아들 랜디 박씨가 개설한 모금사이트에는 20일 밤까지 260만달러(약 29억4,000만원)가 넘는 후원금이 모였다. 무려 6만8,000여명이 후원에 동참했다. 당초 목표 금액은 2만달러(약 2,000만원)였다. 박씨는 동생과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해서 오래 슬퍼할 수도 없는 상태라며 모금을 시작했다. 박씨는 “이 모든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이 마음이 모두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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