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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여 병원 못 가고 상비약 삼키며 견딥니다"

입력
2021.03.28 17:00
수정
2021.03.28 18:28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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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관 몰이해에 '아파도 참는' 트랜스젠더
서로에게 "꼭 자연사하자"는 인사 건네기도

<1>병원이 공포인 사람들

'방문하는 상상만으로도 불안해진다.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가슴이 뛴다.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다. 무서워서 대부분은 안 가고 참는다. 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다.'

한국일보가 취재한 트랜스젠더들의 심정을 취합하면 이렇다. 트랜스젠더들이 이토록 꺼리는 장소, 바로 누군가는 가벼운 증상만 있어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동네 병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4명 중 1명꼴(27.9%)로 병원 등 의료기관에 가야 하는데도 방문을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트랜스젠더들은 성 확정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와 상관없는 일반 진료를 받을 때도 혐오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며, 결과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트랜스젠더 남성인 정현(활동명)씨는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의원 등에서 "본인이 맞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고, 재방문 환자였는데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기도 했다. 이런 불편함을 겪은 병원은 다시 가기가 힘들다. 정현씨가 1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며 트랜스젠더 상징 배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홍인기 기자

트랜스젠더 남성인 정현(활동명)씨는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의원 등에서 "본인이 맞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고, 재방문 환자였는데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기도 했다. 이런 불편함을 겪은 병원은 다시 가기가 힘들다. 정현씨가 1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며 트랜스젠더 상징 배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인권위에 따르면 수술과 법적 절차를 거쳐 성별 정정을 한 트랜스젠더는 전체 응답 인원(591명)의 8%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법적 성별로 살아간다. 이 때문에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해야 하는 병원에서 트랜스젠더는 혐오의 시선에 상처받고 종교나 신념을 이유로 진료조차 거부당하기도 한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혐오, 무지, 무신경

트랜스젠더 여성 김미지(가명·35)씨는 목이 아파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찾았다가 쫓기듯 나온 적이 있다. 접수대에서는 별말이 없었으나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가 법적 성별과 다른 그의 외모를 보고는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간호사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는 것.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한 이후에야 진료를 시작한 의사는 내내 한숨을 쉬며 혀를 차는 등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김씨는 "그런 일을 겪고 나선 병원 근처도 가지 않게 됐다"라며 "대신 집에 상비약을 잔뜩 사두고 아프면 약만 먹으며 견딘다"라고 털어놨다.

트랜스젠더 남성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정현(활동명·31)씨는 "허리 디스크로 자기공명영상(MRI)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병원에서 여성 탈의실을 안내받았다"라며 "싫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참았다"라고 말했다.

호르몬 치료를 받고 수술은 받지 않은 정현씨는 몸에 질과 자궁이 남아 있어 산부인과 진료가 필요하지만, 대다수 산부인과에서는 난색을 표한다. 트랜스젠더 관련 의료 경험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수도권에 있는 일부 트랜스 친화적 산부인과가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정현씨는 "내 기록이 있는 곳만 간다"며 "초진 진료서를 작성해야 하는 곳은 안 가게 된다"고 했다.

일반 증상으로 내원했다가 호르몬 치료를 받는 상황을 밝히고 그 부작용 가능성에 대해 역으로 의사에게 설명하는 촌극도 종종 벌어진다. 김결희 강동성심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다면 똑같은 증상으로 내원해도 그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며 "그런 이해가 없다면 적절한 조처를 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의료 전반에 트랜스젠더 친화적 환경이 필요한 이유다. 심지어 성별 정정을 했다고 실손의료보험과 같은 사설 보험 가입을 거부당하는 일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재난 앞에서도 트랜스젠더들은 또 다른 괴로움을 당했다. 의료적 트랜지션을 마친 트랜스 여성 류세아(30) 정의당 경기도당 성소수자위원장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신분증을 보여줘야 했던 공적 마스크 구입이나, 출입명부로 인해 곤혹스러웠던 이들이 주변에 많다"라고 귀띔했다. 신분이 드러날까 마스크도 사지 못하고, 같은 이유로 외출도 꺼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정신건강 '경고등'… 우울증 만연, 극단적 선택도

트랜스해방전선이 지난해 주최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사의 슬로건. 트랜스해방전선 제공

트랜스해방전선이 지난해 주최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사의 슬로건. 트랜스해방전선 제공

사회적 혐오 속에서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트랜스젠더지만, 이들은 정신과에서조차 혐오를 만난다. 우울증으로 수년간 다녔던 정신과에서 성별 정체성을 둘러싼 고민을 이야기했다가 면박을 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류 위원장은 "4, 5년간 상담했던 곳인데 (정체성) 얘기를 꺼내자마자 태도를 바꿨다"라며 "(의사가) '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고 다니지 말라'며 '군대 가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냐'라고도 하더라"고 했다.

트랜스젠더의 정신건강은 심각한 수준이다. 트랜스젠더 10명 중 6명가량(57.1%·인권위 조사)이 지난해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았다. 공황장애라는 응답도 24.4%에 달했다. 국내 트랜스젠더 278명을 대상으로 2018년 이뤄진 조사(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트랜스젠더 건강연구) 결과 극단적 선택 시도율은 40%였다. 같은 해 기준 전체 성인(0.5%)이나 청소년(3.1%)의 자살 시도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치다.

매년 11월 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갖고 먼저 떠난 이들을 기린다. 트랜스해방전선의 활동가 꼬꼬(활동명·30)씨는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트랜스젠더 지인의 소식이 끊기면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한다"라고 털어놨다.

"때이른 죽음, 수술 아닌 차별이 원인"

트랜스젠더 남성인 정현(활동명)씨의 지갑과 휴대폰에 붙어 있는 스티커와 배지. 성소수자 상징으로는 무지개 깃발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성소수자 중에서도 사회적 성(gender)과 생물학적 성(sex)이 일치하는 않는 트랜스젠더의 상징은 분홍, 하늘, 흰색이 섞여 있는 깃발이다. 홍인기 기자

트랜스젠더 남성인 정현(활동명)씨의 지갑과 휴대폰에 붙어 있는 스티커와 배지. 성소수자 상징으로는 무지개 깃발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성소수자 중에서도 사회적 성(gender)과 생물학적 성(sex)이 일치하는 않는 트랜스젠더의 상징은 분홍, 하늘, 흰색이 섞여 있는 깃발이다. 홍인기 기자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는 과거 “(주변의 트랜스젠더 지인들이) 수술하신 분도 안하신 분도 60세가 되기 전에 다 돌아가셨다”고 밝혀, 트랜스젠더 수명에 대한 논란을 던진 적이 있다.

트랜스젠더의 수명이나 사인(死因)에 대한 공식 통계는 없다. 한국일보가 만난 트랜스젠더들은 일부에서 일어나는 '때이른 죽음'이 호르몬 치료나 성 확정 수술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성적 지향을 떠나서 사회적 성소수자라는 것에서 오는 심리적인 문제"(정현)라거나 "호르몬 투약이나 수술 때문에 트랜스젠더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취약하다는 말이 있는데, 편견과 차별 때문이지 의료 문제는 아니다"(김미지)라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성 확정 수술이나 호르몬 투약 자체를 했다고 (수명이) 줄어들지 않는다"면서 "트랜스젠더의 평균수명에 대한 유의미한 연구 결과는 없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인 차별로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의료기관도 제대로 가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류 위원장도 "사회적 차별이 없었다면 일찍 죽지 않았을 텐데, 차별해놓고 '너희는 빨리 죽는다'고 얘기한다"라고 꼬집었다.

"맛있는 밥 챙겨 먹고, 꼭 자연사(自然死)하자."

꼬꼬씨는 트랜스젠더 지인들과 만나면 나누는 인사를 알려줬다. 노화로 인한 죽음을 '소망'이라 할 정도로 트랜스젠더의 건강한 삶은 녹록지 않지만, 이들은 서로 약속하며 하루를 견딘다. 그는 여기에 작은 소망 하나를 더 보탰다. "아플 때 눈치 보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혼잎 기자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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