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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가 어때서?

입력
2021.03.21 22:00
27면
영화 '캐리'(2013) 스틸컷

영화 '캐리'(2013) 스틸컷


나한테 취미가 하나 있다면 공포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TV, OTT 서비스에서 찾는 장르도, 좀비·유령이 출몰하고 유혈이 낭자한 호러물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유(類)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러, 판타지, 스릴러 따위를 주로 작업하는 번역쟁이인지라 그럴듯한 이유도 있다. "소설 분위기를 파악해야 하거든요."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캐리'(2013)다. 스티븐 킹의 데뷔소설을 영화화했는데 벌써 세 번째, 소설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다. 기독교 원리주의자 어머니 밑에서 사회성을 배우지 못한 소녀가 학교에서 왕따, 폭력, 혐오 등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끔찍한 복수를 한다는, 이른바 유혈낭자잔혹극이다. 절정에 이를 즈음 한참 빠져서 보는데 아내가 지나가다가 툭 한마디 던진다. "어휴, 저 피 좀 봐. 저런 영화는 왜 본대? 정신 사납게?"

내가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불만을 표하고 만다. 나와 반대로 가벼운 드라마의 가벼운 폭력도 간단히 못 넘기는 성격인지라, 내가 그런 영화만 보다가 살인마나 괴물, 사이코라도 될까 살짝 불안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얘기도 했다. "공포영화 보고 사이코가 되면 '겨울왕국', '알라딘' 같은 영화 좋아하면 다 개과천선하고 뉘우치고 새출발해요?" 영화란 애초에 그런 거다. 적당히 감상하고 적당히 감동하다가 2시간 지나면 다 까먹고 마는 것. 사실 공포영화 빼면 나도 볼거리가 별로 없다. 오락은 유치하고, 명작/문제작은 60 넘은 나이에 골머리 싸매기 싫어 사양이다. 가난한 서생 주제에 해외여행 프로그램 봐야 배만 아플 테고 직접 농사 지어 밥상 차리는 입장이니 먹방도 관심 밖이다. 그럼 뉴스?

"정인이 부검의 '췌장 절단될 정도 손상… 폭행 있어야 가능'"

"제2의 '소라넷'…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

"서울 시장 후보, '퀴어특구' 논란... '원하는 분들 가서 즐기면 명소 되고...'"

"LH 직원의 망언 '꼬우면 이직하든가, 어차피 한두 달 지나면 잊혀'"

며칠 새 뉴스 매체를 달군 헤드라인들이 죄다 이렇다. 탐욕, 폭력, 혐오… 세상이 공포영화보다 끔찍해진 지 오래다. 요즘 뉴스 보기 무섭지 않다는 사람 있던가? 그나마 공포영화에는 ‘정의 구현’이라는 그럴싸한 결말이라도 있다!

'캐리'의 저자, 스티븐 킹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속에 굶주린 악어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 그러니까 악어는 가장 추하고 잔혹한 본성 같은 것이리라. 공포영화를 보는 행위는 악어가 문명사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거나, 날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단다.

"'소울' 같은 영화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감동하고는,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부동산 시세 알아보고 애들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기를 쓰는 사람보다 덜 위선적이잖아요? 중·고등학교에서 '캐리' 같은 영화 틀어주면, 학폭이 절반은 줄어들 텐데." 난 기어이 아내한테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고 만다. 공포영화가 어때서? 난 오히려 스티븐 킹의 결론이 맘에 든다. "레넌과 매카트니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고 노래했죠. 물론 맞는 말입니다. 다만 그 전에 악어들이 나오지 못하게 먹이를 주어야겠죠." 사랑을 위해서라는데, 왜 공포영화를 피하겠는가. 악어가 미쳐 날뛰지 않는 한, 세상은 평화롭고 나도 평화롭고 공포영화도 평화롭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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