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영웅' 90세 멕시칸 노병은 한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입력
2021.03.25 04:30
한국전 참전 멕시칸 생존자들을 찾아서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멕시코 용사를 찾는다는 포스터의 부분. '대한민국은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쓰여있다. 주멕시코한국대사관은 생존 용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적극적인 홍보활동에 나서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었던 지난해 6월, 부르노 피게로아 주한 멕시코 대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약 180만 명 중 10%가 라틴계였으며 이 중 10만여 명은 멕시칸 또는 멕시칸-아메리칸이었고, 멕시코계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도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멕시코는 한국전쟁 중 의료 및 물자지원국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멕시칸의 참전 사실은 새로운 소식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멕시코 간 병역협정에 따라 멕시코에서 자란 청년들은 미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단신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입대한 멕시칸들도 있었다. 군복무 후 다시 고향인 멕시코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들은 '잊힌 용사'가 되었던 것이다.

멕시칸 참전용사들을 찾아서

"우리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살아계셔도 이미 90세 전후가 되셨을 텐데, 게다가 이 팬데믹 상황에…"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은 솔직히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하지만 더 늦출 수는 없기에 즉각 한국전쟁 멕시칸 참전용사 찾기에 나섰다. 우선 멕시코 현지 언론기고를 통해 멕시칸 참전용사의 존재를 알렸다. 멕시코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었다. 주한 멕시코대사관에서 두 분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지난해 7월 맨 먼저 호세 비야레알(90)씨와 연락이 닿았고, 7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멕시코 용사를 세상에 소개할 수 있었다. 이어 9월에는 로베르토 시에라(90)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생존 멕시칸 용사들. 왼쪽부터 호세 비야레알, 로베르토 시에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헤수스 칸투

두 분을 통해 더 많은 참전용사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광고, TV·라디오·유튜브 출연, 군사잡지 인터뷰, 미니다큐 제작 등을 통해 멕시코 전역에 '참전용사 찾기 캠페인'에 나섰다. 얼마 후, 한 참전용사 유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록 본인은 없지만 그래도 가족들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전했다.

드디어 올해 초 캠페인의 성과가 나왔다. 세 번째 참전용사이자, 주 멕시코 한국대사관의 자체 홍보노력으로 찾은 첫 번째 사례자였다. 지난 2월, 나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90)씨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국경 근처인 소노라주로 날아갔다. 이달 초에는 몬테레이에 거주하는 네 번째 참전용사 헤수스 칸투(86)씨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이밖에도 3명의 참전용사 유가족으로부터 제보를 받아 현재 확인 중이다.

현재까지 찾은 생존자는 4명. 더딘 것 같지만 그래도 70년간 완전히 잊혔던 멕시칸 참전용사들이 서서히 세상에 소환되고 있다. 멕시코 현지에선 자신들도 몰랐던 존재들을 찾아내준 한국정부에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4인의 생존자

첫 번째로 만난 호세 비야레알씨는 미국 LA 출생으로 부모는 이주노동자였다. 네 살 때 멕시코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낸 뒤 18살 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홀로 넘어와 미 육군에 입대했다.

어느 날 오후 부대장은 그에게 한국전 파병을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부모님께 제대로 연락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시애틀항을 출발하던 날, 자신에게 축복을 빌어주던 어느 미국 부인의 모습을 그는 지금껏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작전에 참전했다. 상륙 후 사열자리에서 맥아더 장군이 “어쩌다 멕시칸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라며 어깨를 다독여줬다고 했다. 이어 닥친 한국의 겨울은 멕시코에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을 때 따뜻한 물을 데워 녹여주던 어느 전우의 사랑, 늘 자신을 도와주던 이름 모를 한국전우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첫 번째 생존참전용사 호세 비야레알이 자서전 '어느 멕시칸의 한국에서의 기억'을 펼쳐보이고 있다(왼쪽부터). 김건 외교부 차관보의 평화의 사도 메달 수여, UN한국전 참전 메달 및 군번줄

18개월의 파병을 마치고 전역해 멕시코로 돌아온 날, 친구들은 “우리 영웅이 돌아왔다”며 환영했다. 동네 어귀 가게엔 그의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아, 이제 떠나지 마라. 집에 프리홀(멕시코 콩요리)을 준비해 놓았단다”라면서 안아주었다. 이후 그는 시민의 삶으로 돌아와 GM멕시코에서 근무했고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기억들을 모아 ‘어느 멕시칸의 한국에서의 기억’이라는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언젠가 누군가는 이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알아줬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국전쟁을 회상하며 동족 간 전쟁이라는 사실이 참 슬펐다고 했다. 특히 전역 후 미국이든 멕시코든 참전용사로서 기림과 존경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고 여러 번 말했다.

두 번째로 만난 로베르토 시에라씨는 데킬라의 고장인 과달라하라에 산다.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지팡이를 짚은 채 현관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와 청년기를 멕시코에서 보냈고, 군복무를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미 해병대에 지원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통신병으로 네 차례 전투에 참가했다. 수색정찰 중 적의 공격에 많은 전우를 잃은 기억을 끄집어낼 때는 슬픔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다리 부상으로 전역한 뒤에는 데킬라 시험관으로서 평생을 보냈다. 자녀들도 잘 키워 멕시코 외교부에 대사로 근무하는 아들도 있는데, 사실 그 아들이 주한 멕시코대사에게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생존용사 로베르토 시에라와 아내가 우리 정부가 제작해 전달한 태극기 문양의 감사 액자를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얼마 전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씨도 방문했다. 그도 미국에서 태어나 5살 때 멕시코로 이주해 청년기까지 보냈다. 대학 진학을 위해 1948년 미 육군에 입대한 그는 제4보병사단 21연대 소속 소총병으로 주일미군으로 파병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5일 만인 6월30일 대구공항에 내렸다. 풍전등화의 한국을 돕기 위해 가장 먼저 도착한 미군 중 한 명이다. 그는 11개월간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38선 돌파, 평양탈환 작전에 참전했는데, 압록강까지 불과 5,000야드를 남겨놓고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했다고 했다. 미국 귀국 후 신병교관을 마지막으로 총 4년의 군복무를 마쳤으며, 한국전쟁 유공으로 동성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수여 받았다.

세 번째 생존용사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의 참전 당시 모습(왼쪽 윗줄)과 훈장, 우리 정부의 감사 액자(왼쪽 아랫줄)와 가족들과의 기념사진

그는 현재 거주하는 소노라에서 농축산물 관련 일을 하며 자녀 7명을 키웠다. 부인과 사별한 후엔 손주, 증손주까지 38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인근에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한국전쟁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왜 참전용사를 찾느냐’며 딱딱하게 반문했다. 우리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진 모습이 기억난다.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최근 연락이 닿은 네 번째 생존참전용사, 헤수스 칸투씨는 기아자동차 멕시코 공장이 있는 몬테레이에 산다. 지금까지 만난 참전용사 중 가장 어린 17세에 미 육군에 입대, 7사단 23연대 공병으로 1951년 1월 인천에 도착했고 1953년 전투 중 부상을 입을 때까지 참전했다. 장교(대위)로 전역한 후에는 현 거주지역에서 건축회사 엔지니어로 활동했다고 한다. 곧 방문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감사를 전하려 한다.

네 번째 생존용사 헤수스 칸투의 참전 당시 모습들

참전용사 본인은 작고했지만, 한국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유족이 있다. 오스카르씨 가족이다. 그는 1953년 첫 파병 이후 한국이 너무 좋아 전후인 1955년에 자원해 또다시 한국행에 올랐다고 한다. 유품으로 보여준 사진에는 광화문 거리, 한국 어린이와 여인들, 갓 쓴 어르신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노부인과 딸은 한국상점에서 음식을 사서 유튜브를 보고 요리하고, 한국드라마도 즐겨보는 한류팬임을 자랑했다.

작고한 참전용사 오스카르의 한국 복무 당시 모습(윗줄 왼쪽)과 거리 풍경, 한류팬이라는 부인과 딸.

만약 이들이 미국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면, 참전용사회 행사에 참석해 동료를 만나고 존경도 받고, 또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발전한 대한민국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멕시코도 그동안 이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70년이 지나는 동안 알지 못했고 찾지 못했기 때문에.
‘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아직 살아계실 때, 기억이 있으실 때 찾아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도록 지켜주셔서.

멕시칸 참전용사께, 그리고 그 가족들께 드리는 마음이다.

참전용사를 방문할 때면 정복을 입고 찾아가 경례한다. 그 경례를 받는 노병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태극기를 자개액자에 담아 선물하면서 ‘당신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읽을 때면,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내게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내 모든 삶에 있어 당신은 내 친구입니다’ ‘대한민국에 감사를 전해주십시오’라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멕시코 유력 일간지 레포르마에 실린 포스터(왼쪽)와 작고한 참전용사 루이스 코벨(오른쪽)의 참전 당시 모습. 대사관 측은 미망인이 불과 한 달 전 사망해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얼마 전 국가보훈처에선 코로나19만 진정되면 이 분들을 한국으로 초대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또 멕시코 참전용사들께 KF94 마스크를 보낸다고 한다. 우리는 참전용사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을 수여하고, 후손들에게 장학금 지급을 준비하는 한편 한국 정부의 유학프로그램도 소개하고 있다. 면적이 우리나라의 22배나 돼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지만, SNS를 통해 인사와 소식도 나누고 있다. 참전용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참전한 다른 나라들처럼, 참전용사 모자도 제작할 것이다. 호세 비야레알씨가 쓰신 자서전이 정식 출판되면 한글로 번역할 계획도 있다. 주한멕시코 대사관은 ‘한국전 멕시칸 참전용사 특별기획전’을 준비중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더 늦기 전에 어디든 달려가 한 분이라도 더 찾고 만나려고 한다. 70년간 못한 일을 하려다 보니 마음이 분주하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은 멕시칸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멕시칸 참전용사, 우리들의 잊힌 영웅들께 인사하고 약속한다.

글·사진=김윤주 주멕시코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 중령

육군사관학교(53기)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하고 1997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미8군 한국군지원단,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와 UAE 아크부대 파병 등을 거쳐 제3공수특전여단 대대장을 역임하고 2017년부터 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 중이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당신이 관심 있을만한 이슈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