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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간 생존자의 32년만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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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피의자의 변호사(George C. Sena)는 증인석에 앉은 만 26세 피해자 캐서린 햄(Kathleen Ham)의 신원을 확인한 뒤 곧장 "당신 처녀였냐(Were you a virgin?"라고 물었다.
변호사- "왜 도망가지 않았나요? 다리가 부러졌습니까?"
햄- "범인이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습니다."
변호사- "'예스'냐 '노'냐로 답변해주세요."
47년 전인 1974년, 미국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햄이 치른 8일 동안의 재판이 실제로 그러했고, 햄은 만 하루 반 동안 변호사의 피해자 반대신문에 시달려야 했다. 변호사의 전략은 뻔했다. 피해자-피의자는 매춘부-포주의 관계이며, 기소된 범죄행위는 강간이 아니라 '거래에 수반된 다소 거친 협상의 일부'였다는 의심을 배심원들에게 심겠다는 것. 변호사는 한 손에 실을 쥐고 바늘을 쥔 다른 손을 흔들며 "움직이는 바늘에 실을 끼울 수 있습니까?"라고도 물었다.
햄을 진료한 병원(St.Vincent's Hospital) 응급실 의사의 진단도 햄에게 불리했다. 의사는 '막 강간당한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침착했다'는 소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판사 검사 변호사가 모두 남자였고, 배심원 다수도 남성이었다. 배심원단은 만 이틀 평의 끝에 3명이 무죄 입장을 고수하면서 '의견불일치(hung jury)' 평결을 내렸고, 재판장은 미결정심리(Mistrial)로 판결했다. 미국 배심원 재판은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평결로 유-무죄를 가린다. 미결정심리가 나면 검사는 플리바겐(plea bargain, 피의자가 범행을 인정하고 감형 받는 제도)을 하거나 재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11개월 뒤인 75년 10월, 당시 만 28세의 피의자 클래런스 윌리엄스(Clarence Williams)는 뉴욕 퀸스에서 저지른 다른 성폭력 범죄로 기소돼 1심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항소한 피의자는 플리바겐을 시도하며 햄을 강간한 사실도 자백했다. 하지만 1심 재판의 절차상의 오류로 이듬해 10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피의자는 자백 내용을 전면 부인했고, 6,000달러 보석 석방 후 도주했다. 햄의 재심 재판도 재개될 기약이 없어졌다.
사실 햄도 다시 재판에 임할 의지도 기력도 잃다시피 한 상태였다. 훗날 햄은 "재판을 치르며 나는 또 한 번 만신창이가 됐(shattered)"고 "자신감과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인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이주해 출판사(Harcourt)를 다니던 그는 얼마 뒤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듯 캘리포니아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나는 또다시 재판 증언대에 서라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다시 30년이 지난 2005년 10월, 햄은 뉴욕 친구(Nancy Fischer)의 전화를 받았다. 맨해튼 지방검찰청 미결수사팀이 범인을 체포했으며 검사가 직접 통화를 원하는데 응하겠냐는 내용이었다. 햄은 "숨이 턱 멎더라"고 했다.
어딘가에 있을 '괴물'이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 자신에게 한 짓을 다른 누군가에게 범하고 있으리라는 불안, 끝내 맞서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죄의식.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별도의 비상구가 없는 집에선 잠을 잘 수 없었고, 유사시 곧장 깰 수 있도록 방문 앞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머리맡에 식칼을 두어야 그나마 누울 수 있었던 긴 불면의 세월. 어렵사리 81년 LA 사우스웨스턴 로스쿨을 졸업해 민사변호사로 일하면서도 그는 내도록 "나만의 사설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고, 90년대 초 '법정 공포증'이 재발해 재판 사건은 아예 맡지 못했다. 한시도 잊지 못한 악몽같은 일들이 생생히 되살아나며 공포와 분노와 흥분에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므로 내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불쑥 말한 그 순간, 내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진 듯했다"
2005년 뉴욕타임스 인터뷰
만 58세의 햄은 용기를 내서 검사와 통화했고, 2005년 11월 4일 재심 재판 증언대에 다시 섰다. 검찰은 32년 전 쓸모 없던 증거품인 햄의 속옷에서 피의자의 DNA를 채취했고, FBI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 대조로 범인이 저지른 20여 건의 성폭행 여죄 목록도 확보해둔 상태였다.
성폭력 등 젠더 범죄에 대한, 특히 피해자에 대한 공권력과 사회의 인식과 태도도 이전과는 달랐다. 1994년 미 법무부는 피해자 인권을 위한 감정적 배려와 의료 등 제도적 지원 조치를 포함한 방대한 분량의 '강간사건 대응 지침'을 마련했다. 피해자 성경험과 이력에 대한 질문, 즉 성적 권리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2차가해는 당연히 금지됐다. 여러 차례 법도 바뀌면서 강간의 개념도 범위도 확장됐고, 기소의 전제처럼 통하던 피해자의 물리적 저항이나 즉각적인 신고 여부도 기소 판단의 큰 변수가 아니게 됐다. DNA 증거 능력이 인정되면서 피해자나 목격자 진술의 무게도 상대적으로 줄었고, 검찰 경찰에는 강간사건 전문 수사 심문 교육을 이수한 전담팀이 신설됐다.
법 제도와 사회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성폭력 범죄 피해자들도 한사코 숨거나 움츠리기만 하지 않게 됐다. 캐서린 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05년 재판 직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며 범죄와 1심 재판의 참담했던 전개를, 재판 이후 겪어온 고통과 절망을 털어놓았고,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데도 동의했다. 2005년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므로 내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불쑥 말한 그 순간, 내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진 듯했다"고 말했다. "비로소 내 목소리를 되찾고, 해야 할 말이 뭔지 알게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뉴저지 주 화장품회사 임원이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UC버클리 정치학과를 다니며 60년대의 페미니즘과 격렬한 청년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68년 히치하이킹 유럽 여행을 다니며 체코 '프라하의 봄'을 현장에서 지켜봤을 만큼 겁 없고 당당한 청년이었다. 소방 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을 넘어 침입한 복면 강도에게 속수무책 강간 당한 73년 6월 26일 새벽 그 사건 이후, 이듬해의 절망적인 재판 이후 32년만에 비로소 얻게 된 자신감이고, 자존감이었다.
플레처 앤더슨 워렐(Fletcher Anderson Worrel)로 이름을 바꾼 범인은 80년대 초 워싱턴 사우스웨스턴대를 졸업하고 무슬림으로 개종해 아랍어 번역가 겸 통역사로 일했고, 한 차례 결혼-이혼으로 장성한 두 아이를 둔 자였다. 그가 87~91년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카운티 일원에서 22건의 연쇄 강간을 저질러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한 '실버 스프링 강간범(Silver Spring Rapist)'이며, 93년 뉴저지 주에서도 최소 2건의 강간을 저지른 사실은 DNA 증거로 밝혀졌다. 저 범행들을 저지른 뒤 범인은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 약 10년간 통번역사로 일하다 2003년 귀국했고, 이듬해 조지아 주에서 총기를 구입하려다 뉴욕 주 수배 사실이 들통 나 체포됐다. 체포 직후 그의 변호사는 "지역 무슬림 공동체에서 존경받아온 성실한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직후의 반응도, 스트레스장애 등 후유증의 양상과 강도도 사람마다 다양하며, 그 다름이 평소 성격이나 성경험 유무 및 과다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도 이제는 상식이 됐다. 워렐의 강간 피해자 중에는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끊임없이 부주의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공포에 떠는 이가 있었고, 강간 당한 그 집에 그대로 산 이도 있었다. 한 여성은 "당시나 지금이나 강간 자체는 사실 별 게 아니었다. 더 화나는 건, 단지 섹스를 위해 나를 스토킹하고 내 집에 침입해 나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이다"라고, 범인 체포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재판 전날 밤, 햄은 발작처럼 찾아 드는 과호흡 증상을 줄담배로 눅여야 했고, 십자말퍼즐에 마음을 집중하며 불안과 흥분 속에 밤을 지새야 했다. 재판 당일 증인석에 앉은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뉴욕 집 열린 창문 앞에 앉아 있는 듯했다.(...) 폭력의 공포는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고 잠시 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증언을 시작했다"고 재판을 참관한 기자는 썼다. 변호사는 "피해자 진술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전혀 없다"는 말로 단 12분 간의 반대신문을 끝냈다. 판사 검사가 모두 여성이었고, 배심원 12명 중 7명이 여성이었다. 그 '사소한 차이'가 달라진 세상의 방증이라고, "완전히 다른 재판이었다"고 그 기자는 전했다.
배심원단은 약 2시간 평의 끝에 만장일치로 유죄를 평결했고, 판사는 1급강간죄로 최장 25년형을, 햄의 지갑에서 4달러를 훔친 강도죄로 21년형을 선고했다. 피의자는 뉴저지 연쇄강간 등에 대한 2010년 별도 재판에서 추가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캐서린 햄이 회복한 기적적인 정의는 73년 기소가 이뤄졌고, 재판이 미결정심리로 동결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간사건 공소시효는 등급에 따라 5~10년이었지만, 이미 기소된 뒤여서 시효가 무의미했고, 미결정심리여서 재기소가 가능했다. 강간범을 잡지 못해 기소하지 못한 사건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들이 즐비했다. 뉴욕 주는 캐서린 햄 재판 이듬해 1급강간사건(흉기, 납치 등이 결부된 강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대대적인 미결 성폭력 사건의 증거품 DNA 대조 수사를 벌였고, 2019년 9월에는 2,3급 강간을 포함한 나머지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도 당시 5년에서 각 20년과 10년으로 연장했다. 한국의 성폭력(강간, 강제추행) 범죄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그 날 이후 "가벼운 입맞춤도 싫어졌고, 낯선 사람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조차 혐오하게 된" 캐서린 햄은 줄곧 독신으로 살았고, 1월 20일 심폐기능 장애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경찰청 '2019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등이 2만3,537건 발생했고, 2만2,688건의 범인 2만 5,420명이 체포됐다. 강간 및 강제추행범 검거율만 따지면 무려 96.4%. 물론 거기서 말한 '발생'은 신고 등으로 경찰이 인지한 건수다.
하지만 2016년 여성가족부 '전국성폭력실태조사'에서 드러난 성폭력 신고율은 고작 1.9%였다. 피해자는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49.1%), '신고해도 소용 없을 것 같아서'(21.3%) 신고를 꺼린다. 강간 등 중대 범죄를 당해도 가해자가 친지나 직장 상사 등 지인일 때가 많고, 신고 이후 감당해야 할 정서적 물리적 파장 때문에 기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 직후 도움을 요청한 대상은 여성의 경우 '이웃/친구(82.6%)'와 '가족/친척'(49.5%)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경찰서'는 단 2.2%였다. 한 마디로 96.4%란 검거율의 의미는 성범죄 치안에 관한 한 극히 제한적이다.
대한민국 법원행정처의 '2019 사법연감'에 따르면 법원이 강간 및 강제추행 범죄 피의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비율은 96% 이상이다. 2019년 법원이 접수한 강간 강제추행 사건은 총 6,488건. 그중 6,210건의 형사 공판이 열려 3,550건에 집행유예 이상 자유형을, 1,944건에 재산형(집행유예 14건 포함)을 선고했다. 무죄 판결은 228건, 공소 기각은 단 1건이었으니, 공판 건수 대비 3.7%에 못 미쳤다. 유죄이긴 하나 집행유예(자유형 2,185건, 재산형 14건)와 선고유예(103건)를 빼면, 법원이 실제 징역형과 벌금을 선고한 건 3,192건(51.4%)이었다. 그나마도 경찰이 입건하지 않고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사건들을 지운 결과다. 2018 범죄 분석 검찰 연감 등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자 51%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강간과 추행의 죄는 34.7%, 특별법 상의 성폭력 관련죄의 39.4%만 기소됐다.
엽기적인 아동 성착취 영상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의 징역 18개월 형이 말해주듯, 한국의 성폭력 범죄 처벌 수위는 시민의 법 감정, 특히 피해자의 정의와 사뭇 동떨어져 있다. 누범의 죄에 별도로 형을 매겨 합산하는 영미법계와 달리, 한국의 법체계는 가장 중한 범죄의 최대 형량의 1/2만 가중 처벌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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