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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이란 렌즈를 버리면 섹스란 이렇게나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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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삶에서 지평이 넓어지는 일은 부대끼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지?”, “왜 이런 걸 불편해하지?”, “말이 안 통하네”, “이상해 보여”. 이런 생각이 든다면 마음을 잘 관찰해봐야 한다.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고, 어느새 당연해진 질서는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확장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느리고 천천히 긴장을 일으켜가며 이루어진다. 타자를 만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순간을 만났다면 실은 참 감탄할 만한 순간이다. 넓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다양한 버전의 삶을 허락할 것이다.
나의 친구 예구리는 무성애자다. 에이로맨틱×에이섹슈얼로 어떤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이든 낭만적으로도 성적으로도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 예구리는 유성애에는 늘상 유난이 허락된다고 말했다. 뭐든 기껍고 당연하게 여겨진다고도 말했다. 듣고 보니 맞았다. 에로스는 인간 관계의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랑 때문에 그 많은 죽음과 폭력이 있었는데도!
연애와 섹스 이야기가 반복될 때마다 예구리가 맥을 끊고 불편함을 말해준 덕에 (예구리 말마따나) 이 사회가 얼마나 ‘유성애 대환장파티’인지를 깨달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사랑 이야기였다. 소설을 보아도 여행을 가도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동식물을 볼 때도 그렇다. 수컷 공작은 화려한 깃털을 펼쳐 보이며 암컷을 흥분시키고, 고래는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닿도록 울음소리를 뻗어 낸다. 새는 지저귀고 반딧불이는 빛을 내고 꽃은 향기와 자외선을 내뿜는다. 이쯤 되니 온 지구가 성애에 미쳐 있는 것 같다. 교미 끝에 기꺼이 암컷에 목숨을 내놓는 수컷 사마귀처럼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성(性, sex)이란 번식할 때 ‘유전자를 섞는다’는 뜻이다. 무성생식은 단 하나밖에 없는 부모의 복사판으로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를 계속 반복한다. 물론 드물게 돌연변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렇다. 한편 유성생식은 일종의 셔플링(기회를 만들기 위해 카드를 임의로 섞는 것)이다. 두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를 섞어서 자손을 만든다. 수컷이 가진 카드 패와 암컷이 가진 카드 패를 섞은 뒤 새로운 조합의 카드 패를 내놓는다.
앤 드류안과 칼 세이건은 함께 쓴 책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억 년 전, 생물은 하나의 거래를 했다. 그 거래란 개체의 불사성(不死性)을 잃는 대신 성의 기쁨을 얻은 것이다. 죽음과 성, 우리는 죽음 없이 성을 얻을 수 없다. 자연은 생물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거래를 강요한 셈이다.”
무성생식하는 생물이 자신의 클론을 계속 만든다는 점에서 불사의 존재라면, 유성생식하는 동물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포기하고 상대방의 것과 뒤섞는다는 점에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할까? 사실 지구의 생물은 역사의 절반 이상을 성 없이도 훌륭하게 지내왔다. 실제로 성이 생식을 위해 꼭 좋은 수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성을 가지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성은 성공적인 유전자 조합을 만들자마자 해체한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둘째로 짝짓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공작새의 깃털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날기에 불편하고 이는 수컷 공작새의 생존력을 떨어뜨린다. 셋째로 성병의 위험이 있다. 넷째로 이론 유전학자 메이너드 스미스가 지적하는 ‘두 배의 손실(twofold costs of sex)’이 있다. 유성생식은 두 개의 세포가 하나의 세포를 만들기 때문에 무성생식보다 자손이 번성하는 속도가 훨씬 더디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성은 생물의 세계에서 보편적이다. 대부분 진핵세포 생물은 유성생식을 한다. 도대체 왜? 생물학자가 내놓은 답은 유전적 다양성이다. 유전자를 계속해서 섞어 다양한 조합의 유전자를 만들면 만들수록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여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무성생식 집단은 돌연변이가 나타나도 이것을 제거하지 못하고 계속 축적되어 개체의 삶을 위협할 수 있지만,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수시로 유전자의 결함을 제거할 수 있다. 기생충이나 병원균이 무성생식을 하여 빠르게 번성하기 때문에 이에 맞서기 위해 숙주 생물이 유성생식을 택했다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성의 기원과 진화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앞서 열거한 성의 이득은 유성생식이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성의 시작점과는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규정한 관습대로 자연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시켜 해석한 자연을 근거로 규범을 설명하려 들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의 분명한 이분법적 구분이 그렇고, 이들에게 부여한 성 역할을 설명할 때도 그렇다.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말할 때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인간이 보고 싶은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찾아보면 사회가 정한 관습과 직관의 뺨을 후려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을 구분하는 기준은 생식 세포의 크기다. 수컷은 크기가 작은 생식 세포를 만드는 존재, 암컷은 크기가 큰 생식 세포를 만드는 존재다. (이토록 단순하다!) 한 번 결정된 성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수컷에서 암컷으로, 암컷에서 수컷으로의 성전환은 자연에서 자주 일어난다.
꽃을 피우는 식물의 절대 다수는 한 꽃에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가진다. 같은 꽃의 암술과 수술 간에는 꽃가루를 주고받지 않는다. 대부분 꽃에서는 수술이 먼저 발달하고 벌이나 나비가 꽃가루를 실어 나르면 그제야 암술이 발달해 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는다. 어떤 개체는 아침에는 수컷으로 꽃가루를 만들고 저녁이 되면 성을 바꾼다. 수컷에서 암컷으로 점차 변화하므로 그 과정에서 거의 무한대의 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호초 지역에 사는 무지개양놀래기는 떼를 이루어 사는데 대부분 암컷으로 태어났다가 몸집이 커지면 그 중 한 마리 또는 일부가 수컷으로 빠르게 변한다. 외형은 물론 체내 생식기와 행동도 변한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니모로 알려진 광대물고기도 자라며 성이 바뀌는 대표적인 종이다.
도마뱀 중 많은 종은 암컷만 있고 무성생식을 하기 때문에 정자에 의한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 전부 암컷만 있는 물고기도 있다. 사실 주요 척추동물 집단의 대부분에서 암컷만 존재하는 종을 찾을 수 있다. 파충류 일부는 알이 자랄 때의 온도로 성이 결정된다. 암컷은 그늘진 자리에 낳을지 햇볕이 드는 자리에 낳을지를 골라 새끼의 성비를 조절할 수 있다.
갈매기 사회에 레즈비언 부부가 많다는 사실은 1970년대부터 보고되어 왔다.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는 함께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도 키운다. 짝짓기는 주변 수컷과 하고 돌아와 암컷과 살림을 차리기 때문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의 둥지에는 종종 이성애 갈매기 부부의 둥지에 있는 알보다 두 배의 알이 있다. 알뜰한 살림꾼이 아닐 수 없다.
해마는 수컷이 알을 낳는다. 수컷 해마의 배에 있는 주머니에 암컷 해마가 난자를 넣어두면 그곳에서 난자가 수정되어 배아가 된다. 수컷이 임신하는 셈이다. 수컷은 주머니 속 배아에 산소를 제공하고 염분 농도를 적당히 유지해가며 기르고 뿜어내듯 출산한다. 수컷 해마가 출산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꼭 찾아보길 권한다.
잘 알려졌듯 하이에나는 모계중심사회를 이루며 산다. 그 중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은 겉모습으로 볼 때 수컷의 음경과 거의 똑같은 신체기관을 가진다. 클리토리스가 매우 크게 발달한 것인데 오줌이 클리토리스로 나오기 때문에 클리토리스가 곧 음경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암컷 음경에는 해면체도 있어서 발기도 가능하다. 이 기관을 통해 암컷은 짝짓기도 하고 새끼도 낳는다.
과학의 목표는 곧 최대한의 진실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진실에 가까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의 렌즈를 벗어 던져야 한다. 진화에는 성별이분법, 이성애중심주의, 유성애중심주의와 같은 방향이 없다. 오직 환경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대원칙만 있을 뿐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규칙을 고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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