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에 ‘염소 두 마리’

입력
2021.03.17 04:3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다는 노랫말이 있다. ‘푸른 저 초원’도 아니고 ‘저 푸른 초원’이 입에 착착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말에는 지시어가 상태를 표시하는 말에 앞서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빨간 벽돌집, 저 두 큰 가방’처럼 꾸미는 말 사이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어순이란 자연스러움을 논하는 정도를 넘어, ‘두 저 큰 가방’처럼 순서가 뒤바뀌면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수를 표현하는 말에도 순서가 있다. 어느 언어에서나 헤아리는 말은 사용 빈도가 높아 중요하다. 우리말에서는 ‘밥 한 번, 차 한 잔’과 같이 먼저 대상이 앞서고 수와 단위가 뒤따른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서 잔뜩 힘주며 나타난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한다. 이 장면에서 ‘한 떡’은 영 어색하다. 이 규칙을 고의적으로 어겨 신선함을 노리는 표현도 있다. 노랫말인 ‘마시자, 한 잔의 술’은 어떤 세대에게는 아주 익숙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아주머니, 여기 한 마리의 통닭을 주세요’라 하면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한창 우리말을 배울 아이들이 보는 동화 제목이 ‘두 마리 염소’로 붙고, 동요에서는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이 들린다. 간명한 제목, 리듬과 운의 조화 등등 여러 이유로 합리화를 하는데, 한 나라의 말을 두고 사용자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어와 어순이 다른 언어권에서 온 외국인이 ‘나는 한 명 오빠 있고, 한 명 언니 있어요’라고 할 때 고쳐 말하게 할 명분이 없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