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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부패 명분 내세워도 '선한 쿠데타'는 없다

입력
2021.03.15 20: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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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군부 쿠데타 반대 촛불집회에서 시위대가 휴대전화 불빛을 밝히고 있다. 미얀마 군정이 양곤의 두 곳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혈 진압을 이어가면서 이날만 최소 38명이 숨졌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AP=뉴시스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군부 쿠데타 반대 촛불집회에서 시위대가 휴대전화 불빛을 밝히고 있다. 미얀마 군정이 양곤의 두 곳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혈 진압을 이어가면서 이날만 최소 38명이 숨졌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AP=뉴시스


쿠데타는 민주주의 실패이고 전복이다. 냉전 해체와 함께 전통적 의미의 쿠데타 시대는 끝났다고들 했다. 민주주의 내부의 숨은 위험에 더 주목하면서, 심야에 탱크를 몰고 정권을 탈취하는 쿠데타는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는 말로 보였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쿠데타가 깨어났다.

아프리카 말리에 이어 미얀마에서 군부가 합법 정부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유혈 쿠데타가 발생했다. 볼리비아, 알제리에선 군부가 무력행동을 경고하자 정권이 스스로 퇴진하는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리비아, 베네수엘라, 아이티는 쿠데타 음모로 내분에 휩싸였다. 사라지던 쿠데타에 이처럼 비상벨을 울린 건 군부다. 그러나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에 대한 실망은 쿠데타 세력을 꿈틀거리게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정치불안을 가속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1950~2010년 사이 무려 457건의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학계는 집계하고 있다. 지난 60년 동안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민주주의가 안정된 22개 국에 불과했다. 군부 힘이 강했던 냉전 시기 민주주의 역류의 75%는 쿠데타가 원인이었고, 한 해에 수십 건의 쿠데타가 발생한 적도 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함께 쿠데타는 연간 한두 건에 그칠 정도로 줄어들었다. 쿠데타의 퇴진에 맞물려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은 커졌다.

이 시기를 전후해 무려 30여 국가에서 민주 정치체제가 도입됐다. 미국 정치학자 새무얼 헌팅턴은 20세기 말의 세계적인 민주화 현상을 ‘제3의 물결’로 불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가 제3의 물결이 긴 흐름의 초입인지, 짧은 흐름의 끝인지 확신하지 않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민주주의 폭발’ ‘민주주의 시대’란 말의 성찬과는 달리 민주화로 가는 여정은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중단되거나 기만적인 형태로 작동했다. 가난과 군부 통제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고, 무능력과 부패도 민주 정부를 흔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쿠데타를 경험한 아이티의 현실은 상징적이다. 18세기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운 아이티는 한때 사탕수수로 카리브해 최대 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30번이 넘는 쿠데타가 보여주는 정정불안과 혼란이 거듭된 결과, 지금은 남미 최빈국이 돼 있다. 지난 2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은 쿠데타 시도를 적발했다며 반대 세력들을 체포했다. 시민들이 부패와 경제난에 반발해 모이즈 퇴진 시위를 하던 중 벌어진 쿠데타 음모는 대통령이 수혜자인 점에서 자작극으로 의심받고 있다.

결국 쿠데타의 경고음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금융위기가 닥친 2008~2010년에는 7차례 쿠데타가 발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군부는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 채 때론 무력으로 민간 정권을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었다. 강력한 위계질서와 선진적 조직을 갖춘 군부는 특히 정치가 안정을 잃으면 간섭하려 했다. 2013년 이집트에선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축출한 시위 이후 선거로 출범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군 쿠데타로 실각했다. 하루 800명 넘는 희생자를 냈을 만큼 반발이 거셌으나 무자비한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2014년엔 태국 잉락 친나왓 총리가 역시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유혈 쿠데타가 없지 않지만 냉전 이후 발생한 많은 쿠데타는 그 양상이 과거와 달랐다. 쿠데타로 부르기 애매한, 형태를 달리한 신형 쿠데타들도 나타났다. 볼리비아는 1946년 이래 28번의 쿠데타를 겪고 나서 민주정부가 출현했다. 그러나 투표로 당선된 모랄레스 대통령은 네 번째 연임을 노리다 2019년 11월 군부 압박에 도망치듯 해외로 망명했다. 미 카네기멜론대에서 쿠데타를 연구하는 존 친은 과거 탱크를 앞세운 군부 쿠데타 방식과는 다른 ‘신쿠데타’라고 불렀다. 2019년 알제리와 수단의 정권교체도 이와 유사했다. 알제리의 독재자 압델 부테플리카, 수단의 독재자 오마라 알 바시르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각기 20년, 30년 만에 물러났지만 실은 군부의 위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군부의 쿠데타 경고가 민주주의에 유익하게 작용하는 극적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과거 쿠데타는 가난한 나라의 후진적 증상이었다. 아프리카가 빈곤 상태에서 세계 쿠데타의 진앙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쿠데타는 더는 가난한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부의 실패, 극단적인 진영화가 적대적 정권교체 시도를 초래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미국의 의회진입 사건도 쿠데타 기도로 규정되고 있다. 미국은 영국 스웨덴과 함께 안정된 정치체제 속에서 200년 이상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였다. 하지만 여전히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얀마처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이든 정부를 몰아내고 트럼프를 대통령직에 복귀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사실 젊은 민주국가가 직면한 다른 위험은 독재자의 출현이다. 작년 10월 MIT대 주최 온라인 스타포럼에서 스트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냉전 시기에는 정부 전복 4건 중 3건이 군부 쿠데타 일 만큼 총을 든 무리들이 민주주의 살인범이었다. 지금은 장군이 아닌 선출된 지도자, 대통령, 총리들이 민주주의를 전복시킨다는 것이다. 유권자가 민간 독재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넘겨준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정치개입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계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에 이양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반독재 쿠데타인 경우다. 2009년 온두라스 군부는 장기집권을 꾀하던 마누엘 셀라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선거를 실시해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작년 8월 말리의 쿠데타도 독재의 망령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추동한 사례다. 쿠데타로 혼란을 겪은 지 8년 만에 다시 군이 정치에 나선 것이었으나 시민들은 부패와 무능한 정권을 뒤엎은 군에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2000년 세네갈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는데, 군부가 부인하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한 것이 주효했다.

미 예일대의 니콜라이 마리노프는 이 같은 냉전 이후 쿠데타의 특징은 선거와 같은 민주적 절차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950~1989년 쿠데타 가운데 14%만이 2년 만에 민주주의로 이행한 반면 1990~2015년에는 40%로 이행률이 늘어났다. 쿠데타 세력조차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자신들의 가치로 여긴 점과 거세진 국제사회의 압박이 이유였다. 미국의 경우 1997년 쿠데타 정부에 지원을 금지하는 제재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른바 ‘선한 쿠데타’ ‘반독재 쿠데타’에 대해선 평가가 갈린다. 한편에선 폭력과 불법의 수단에도 불구, 역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긍정적이라고 본다. 아프리카 빈곤 문제를 연구해온 폴 콜리어 옥스퍼드대 교수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 군부의 쿠데타 또는 쿠데타 위협은 중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도발적 주장을 한다. 폭력과 불법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부패한 지도자의 퇴진에 쿠데타가 필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에리카 프란츠 등 정치학자 4인은 공동으로 ‘선한 쿠데타’는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선한 쿠데타라 해도 결국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사례가 더 많고, 국가의 합법적 폭력 수위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1950~2014년 냉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 쿠데타는 민주주의를 자극하기보다는, 새로운 독재자를 권좌에 앉히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아무리 선한 쿠데타라 해도 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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