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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여성인권 운동의 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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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은 핀란드 작가 겸 여성운동가 민나 칸트(Minna Canth, 1844~1897)의 생일이자, 의회가 그의 삶을 기리고자 2007년 제정한 '평등의 날'이다. 학교와 관공서는 국기를 게양하고, 칸트가 살았던 쿠오피오(Koupio)의 학교들은 교정의 칸트 동상에 화환을 바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직물 노동자로 시작해 경영자가 된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장녀였던 그는 노동자 학교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를 두루 거쳐 1863년 핀란드 최초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위베스퀼레 사범신학교(현 University of Jyvaskyla)에 진학했다. 2년 뒤 과학교사였던 요한 칸트(1835~1879)와 결혼하면서 대학을 중퇴하고 7남매를 낳아 길렀다.
칸트는 남편이 편집자로 일하던 한 일간지(Keski-Suomi)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희귀한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은 젠더 차별과 여성 인권, 남성 음주 문제(절주 운동)에 집중됐고, 당연히 대다수 남성 독자들은 그의 글을 못마땅해했다. 그 탓에 칸트는 1876년 지면을 빼앗겼지만, 이듬해 경쟁 매체(Paijanne)로 옮겨 칼럼을 이어 썼다. 소설 연재를 시작한 것도 '패이옌네' 지면이었다. 1885년 발표한 그의 희곡 '노동자의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 남편이 아내가 힘겹게 벌어온 돈을 끊임없이 탕진하며 온 가족을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였다. 그의 작품은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문학은 사실주의 문학이었고, 몇 달 뒤 핀란드 의회는 여성의 재산권, 즉 부부 재산분할권을 법으로 인정했다. 15세 미혼모의 비극을 다룬 '안나 리사'(1895)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 법과 사회 현실을 고발했다.
그는 '여성의 굴종은 신의 섭리'라던 종교 지도자, '남성은 여성과 근본적으로 달라 배우자의 순결을 열망하는 남성의 매춘과 성적 부도덕은 용인된다'던 작가와도 공개 논쟁으로 생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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