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이렇고, 일본인은 저렇다?... 당신은 ‘국민성’을 얼마나 믿는가

입력
2021.03.17 04:30
<33> 인터넷 시대, 현실과 괴리된 ‘국민성’
램지어의 ‘엉터리’ 논문에 투영된 국가주의 프레임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수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20세기 중반 인류학은 '국민성'이라는 프레임을 연구에 도입했지만 현실적으로도 허점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많은 인류학자들이 자기 반성적으로 이 논의에 참여했다. 미국 하버드대 마크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잘못된 내용뿐만 아니라 국가라는 프레임을 역사 기술 속에 악용했다는 점에서 엉터리 논문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인터넷 시대, 학문적으로는 비판받는 ‘국민성’ 개념이 사회적으로는 힘을 얻는 듯

검색 사이트에서 ‘국민성’(nationality 혹은 national character)을 치면 ‘한 국가의 성원에게 공통되는 인성’이라는 그럴 듯한 정의가 튀어나온다. 무엇이든 검색 사이트에 올라온 정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서글픈 세상이지만,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개념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본격적인 이민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이나 일본처럼 비교적 동질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에도 지금은 서로 다른 인종, 언어, 생활 습관이 다양하게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같은 땅에서 북적이고 함께 생활한다고 해서 다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니다. 나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한국인이지만 제자들은 일본인이고, 지구 반대편의 동료와 함께 연구하기도 한다. 나라가 같다고 행동 양식도 같다고 전제하는 사고 방식은 이런 다양하고 ‘잡종적’인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차별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사실 국민성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중반 인류학에서 탄생하고 성립했다. 이후에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허점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많은 인류학자들이 자기 반성적으로 이 논의에 참여했다. 이런 성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인류학에서는 국민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 의식이 존재한다. 국민성 개념을 여과없이 채용한 논문이 심사를 통과해 인류학 저널에 게재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인류학에서는 실효성이 옅은 이 개념이 사회적으로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인의 기질은…’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한국의 인터넷에는 ‘일본인의 성향은…’이라는 댓글이 자주 보인다. 유튜브나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에서도 ‘수줍음이 많은 일본인’이라든가 ‘흥이 많은 한국인’이라는 등의 거침없는 이야기가 거론된다. 개인적 경험에 근거했다면 무조건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차별적 사고 방식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신의를 지킬 줄 모르는 일본의 국민성’이라든가 ‘한국인은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등 많은 혐오 발언이 국민성이라는 프레임을 빌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나는 일본인이니까 끈기가 있다”라든가 “나는 한국인이니 매운 것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국가와 자기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말도 빈번히 들린다. 개인이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까지 훈수를 두고 싶지는 않지만 국가라는 공적 프레임이 사적인 영역을 자꾸 침범하는 모양새가 불편하다. 한일을 오가는 입장에서 이런 문제가 자꾸 눈에 뜨이니 사사건건 ‘프로 불편러’로 살 수밖에 없다.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성립한 국민성 연구

인터넷에서는 세계의 뉴스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언제든지 폭넓게,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다. 다른 나라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보 접근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를 ‘나’와는 다른 ‘남’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그 속에서 국민성 담론이 여전히 힘을 얻는 듯 보이는데, 인터넷이 인류애를 증진시키리라는 기대를 저버린 얄궂은 전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여타 학문에서도 국민성이라는 프레임을 여과없이 원용하는 상황은 더 큰 문제다. 어찌 되었든 인류학은 국민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원죄’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인류학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발언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거슬러 올라가 국민성 연구가 성립한 배경에는 전 세계에서 학살과 폭력이 자행되었던 전쟁의 암울한 그림자가 있다. 이 칼럼에서 <국화와 칼>이라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수행한 일본 문화 연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국가 구성원의 공통적인 인성으로 자리매김한 대표적인 국민성 연구인데, 한편으로는 일본 문화의 정수를 잘 포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만을 근거로 타 문화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베네딕트는 이 연구 중에 단 한번도 일본 땅을 밟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국과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적국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이 연구는 전쟁 시 국내외 프로파간다를 총괄하던 ‘미국전쟁정보국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의 지원으로 수행되었다. 연구자 개인에게 전쟁을 부추길 적극적 의도가 없었을지언정 연구의 배경에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명백히 존재했다.

사이버네틱스의 개척자로도 잘 알려진 그레고리 베이트슨도 1940년대 국민성 연구를 주도한 인류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 역시 국민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우려와 비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국민성이라는 개념의 이론적 한계는 인정했으나, 서로 다른 국가 집단을 비교하는 척도로서는 여전히 실효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인은 수줍음이 많다’는 단정적인 결론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국인과 비교하면 일본인은 수줍음이 많다’는 비교 분석은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편, 국가가 수행하는 교육 제도가 공통된 인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철회하지는 않았는데, 학습 이론과 교육 제도의 사회적 영향에 큰 관심을 쏟은 학자였던 만큼 개념의 의의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이트슨은 영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았지만 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적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을까, ‘관습을 중시하는 영국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영국인에서 미국인으로 이적한 베이트슨의 삶은 그 자체로 국민성 개념의 모순을 드러낸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 스캔들, 학자의 책무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최근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의 마크 램지어 교수의 ‘엉터리’ 논문 사태가 국제적인 학술 스캔들로 번지고 있다.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외교 사안이 걸려 있다는 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화제가 된 측면도 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학문적, 절차적 성실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논문이 저명한 학술지의 이름을 빌려 권위를 인정받을 뻔한 상황이 적지 않은 충격이다. 인터넷에 공개된 그의 논문 일부를 읽었다. 전문 분야가 아닌 법학 혹은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의 논평은 삼가겠지만, 정보학(미디어)과 인류학을 전공한 관점에서도 혹평을 피할 수 없는 논문이었다. 특히 간토 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 문제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한국인은 범죄율이 높다’는 등 반 세기 전 전쟁을 배경으로 성립한 허점투성이 프레임이 버젓이 채용된 상황에 좌절을 느꼈다.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에 분노를 느끼는 이도 많겠지만, 설혹 한국인에 대해 긍정적인 내용이 쓰여져 있다고 해도 국가라는 프레임을 역사 기술 속에 악용한 시도라는 점에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사상가 부르디외는 "학자는 ‘인류의 공무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자적 사명감도 중요하지만 학문의 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끊임없이 성찰,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인류학은 권력에 봉사하고 제국주의와 전쟁을 정당화한 과거에 대해 뼈아픈 성찰 과정을 거쳤지만, 지금도 많은 학문이 인류에 공헌하기보다는 국가 권력과 자본에 봉사하는 손쉬운 길을 택한다. 그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 프레임도 끊임없이 강화되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램지어 스캔들을 단순한 학자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학계가 ‘인류의 공무원’으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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