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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는 다수결이 만든다

입력
2021.03.14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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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니던 막내딸 '천지'가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세 모녀의 가정을 갑자기 떠났다. 유가족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만지'는 동생의 친구 '화연'이가 겉으로만 친했던 가해자의 일원임을 알게 되지만 집단 따돌림이 '화연'이로 대상만 바뀔 뿐 계속 이어지게 되는 현실에 당황하게 된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아이들의 왕따 문화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왕따'란 '왕따돌림'이라는 말에서 '왕'과 '따'만 취해서 만든 은어로 '심한 따돌림'이라기보다는 '집단 따돌림'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은 젊은이들의 우울증은 학창시절의 왕따와 관련이 많으며 '집단'이라는 힘으로 '소수'를 괴롭힌다는 점에서 일본의 '이지메'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유독 한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유교나 농경문화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나'보다는 '우리'란 표현이 더 자연스러운 조직 문화에 기인한다. 조직이 개인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나와 남의 다름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배척하는 분위기의 공동체라면 집단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수직적인 집단주의가 갑질 문화의 토양이라면 수평적인 집단주의는 왕따 문화의 자양분이 된다.

이런 집단주의 문화를 옹호하는 주장의 근거는 수(數)의 우위이다. 즉 숫자가 많다는 것이 권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원래 다수결의 원칙은 소수의 판단보다는 다수의 결정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출발한다. 그러나 다수결이 곧 진실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상대주의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집단주의가 강할수록 소수의 의견은 쉽게 무시된다.

'사카이 도요타카(坂井豊田)'는 저서 '다수결을 의심한다'에서 다수결은 여러 의사 결정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다수결이 항상 옳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수록 다수가 하는 모든 결정은 늘 정당화될 것이며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을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이 늘 옳을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결정 과정에서 일반인의 상식은 반드시 고려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전문성 자체가 여론에 의해 영향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개별 이익을 추구하는 사적의지와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왕따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폭력행위가 모두의 이익에 부합되고 정당하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에 사적 이익을 교묘히 포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다.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누군가를 제거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논리는 파시즘적인 집단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또한 '다수결의 원리'에 기초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포퓰리즘(populism)으로 흐를 위험을 늘 내포한다. 결국 선의의 피해자들을 양산하지만 그 어디에도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한 피해자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평생 살아가야 하지만 가해자들은 다수라는 익명성에 묻혀서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다수결을 의심한다.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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