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윤석열이 오염시킨 원칙

입력
2021.03.11 18:00
26면
구독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4일 오후 사의를 표명하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떠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4일 오후 사의를 표명하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떠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 시사하며 검찰총장 사퇴 ‘나쁜 선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그리도 가벼운가
법치와 원칙 옹호했던 이들에 배신 안겨

2013년 검사 윤석열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국정원 댓글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상관을 공개 저격했을 때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설득이 됐다. 2019년 검찰총장 윤석열이 대규모 수사력을 동원해 조국 일가를 수사한 것은 분명 지나쳤지만 특수부 검사의 습속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를 검찰을 사랑한 검찰주의자라 부를 수 없다. 정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그는 정계 진출을 위한 사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치인 윤석열에 대한 셈법은 벌써 어지럽다. 그가 주장했던 검찰의 중립성, 독립성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단 말인가.

국민의 48%는 윤 전 총장의 정계 진출이 바람직하다고 했고 약 45%가 대선에 나오면 찍겠다고 하니(리얼미터) 분위기를 알 만하다. 법무부의 무리한 찍어내기 시도에 얼마나 질렸는지 초유의 정치적 사퇴마저 그럴 만하다는 여론인 것이다. 나 역시 법과 절차를 무시한 검찰총장 징계는 문재인 정권에 상처만 남길 뿐이라고 칼럼을 통해 비판했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윤 전 총장에게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한다. 그 동안 해온 수사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법치와 정의 실현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냐고.

정권의 온갖 귀책 사유에도 불구하고 윤 전 총장은 임기를 저버림으로써 자기 원칙을 훼손했다. 수차례 “진영과 상관 없이 검찰은 늘 하던 대로 수사한다”고 말했지만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원전 사건 등 정권 관련 수사의 진의는 손쓸 수 없이 퇴색했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수사를 밀어붙였다는 일각의 의심을 이제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언론에 정부 비판을 쏟아내고 마치 출마 선언하듯 대구를 방문한 순간, 한때의 진심조차 오염 안 된 것이 없다. 정치 행보를 공식화할 때 그는 '주목받을 사건을 수사하다 여차하면 정치를 하면 된다'는 나쁜 선례로 후배 검사들에게 남을 것이다.

중대범죄수사청 신설과 검찰의 수사권 박탈이 “헌법정신 파괴”라고 목소리 높인 윤 전 총장의 국민일보 인터뷰는 극적인 별의 순간일 뿐 진짜 사퇴 이유가 될 수 없다. 수사·기소를 일체화해야 강자·권력층의 반칙을 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검찰이 ‘힘 있는 자도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줬다”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횡령,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에는 수사와 재수사를 거치고도 처벌을 면하게 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지만 근거 없는 포르말린 통조림 수사(대법원 무죄)로 중소기업을 망하게 만든 검찰은 그 자신이 약자를 유린한 강자였다. 그는 먼저 수사·기소권을 독점했던 검찰의 과오를 직시하고 반성해야 옳았다. 검찰 개혁이 민주주의 퇴보라고 언론에 항변하기 전에 반부패 수사력을 유지할 방안을 국회에 개진해야 했다.

정치인 윤석열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칼잡이, 특권층으로 살아온 인생이 국민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한편 한국주택토지공사(LH) 투기 수사에 훈수를 두며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감각을 보면 기대 이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어떤 정치인이 되건 검찰의 중립성을 훼손한 책임만은 면제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검찰주의자 윤석열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징계도 먹고 좌천도 받지만 거대 이권을 수사”했던 검사의 마지막은 실망스럽다. “진보 정권 수사하면 보수냐”라고 반문했던 그의 말 그대로 ‘윤석열 찍어내기’에 분노했던 이들도 모두 보수는 아니었다. 열광하는 다수에 묻혀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검찰총장과 함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 검찰의 중립을 꿈꿨던 이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음을 그는 알아야 한다.

김희원 논설위원
대체텍스트
김희원한국일보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