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원작이 다가 아니었다, 빠져드는 무협 드라마

입력
2021.03.13 04:40
17면

<27> 왓챠·웨이브 '일촌상사: 나의 소녀'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43부작의 '일촌상사: 나의 소녀'는 어릴 적 헤어졌다가 협객으로 다시 만난 두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와 성장을 그려낸 정통 중국 무협 드라마다. 웨이브 제공

43부작의 '일촌상사: 나의 소녀'는 어릴 적 헤어졌다가 협객으로 다시 만난 두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와 성장을 그려낸 정통 중국 무협 드라마다. 웨이브 제공


나는 한때 무협 드라마 중독이었다. 1990년대 비디오대여점 한구석에는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녹정기' '초류향전기' '절대쌍교' 등 홍콩 무협 드라마가 가득 꽂혀 있었다. 무와 협, 즉 무술과 의협 정신을 기본으로 하는 무협물은 정파와 사파의 음모와 배신, 현란한 무공과 무술, 애절한 사랑이 범벅되어 있어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웠다. 드라마 한 편에 적어도 30화, 50화가 기본. 비디오테이프 서너 개 빌려와서 다 보고 나면 다음 화를 또 보고 싶어 다시 대여점에 가고를 반복하다 한꺼번에 10개씩 빌리고 며칠 밤을 새우며 폐인처럼 보내기도 했다.

홍콩영화·드라마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비디오대여점도 사라지며 한동안 무협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본토에서 만든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영웅문 3부작'으로 알려진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그리고 '천룡팔부' 등 홍콩 무협소설의 대가로 꼽히는 김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연이어 만들어졌고, 국내 케이블 방송에서도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중국의 광활한 대자연에서 촬영된 무협 드라마를 보는 것은 새로운 감흥이었다. 무협지의 배경이 되는 천혜의 절벽과 계곡, 기암괴석은 과장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의 풍경이었다. 엄청난 물량과 특수효과로 구현하는 무공과 액션 장면들도 즐거웠다.

그리고 무협을 포함한 중국 드라마가 젊은 세대에게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15년 이후 '랑야방: 권력의 기록' '보보경심' '후궁견환전' '삼생삼세십리도화' 등이 화제를 모으며 열광적인 팬이 생겨났다. 나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50여 화의 드라마들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김용 원작 드라마만 겨우 찾아보며, 언젠가 여유가 되면 보겠다는 결심뿐.


'일촌상사'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 부모와 스승의 복수, 절대 고수와 라이벌 등 무협물의 전형적인 설정에 강렬한 사랑까지 더해 시청자들을 무협의 세계로 유혹한다. 웨이브 제공

'일촌상사'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 부모와 스승의 복수, 절대 고수와 라이벌 등 무협물의 전형적인 설정에 강렬한 사랑까지 더해 시청자들을 무협의 세계로 유혹한다. 웨이브 제공


중국 드라마에 대한 정보는 주로 트위터에서 얻는데, 근래 '일촌상사: 나의 소녀(일촌상사)'가 화제였다. 짧은 무술 장면들을 찾아보니 정교하고 호쾌했다. 새로운 중국 드라마는 '일촌상사'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주했다. 다행히 50화는 아니고 43화다. 무협물의 전형적인 설정인 정파와 사파의 대립, 부모와 스승의 복수, 절대 고수와 라이벌 등이 자미류년의 소설을 각색한 '일촌상사'에 다 들어 있다. 그리고 끊일 듯 끊이지 않는 강렬한 사랑이 몇 겹으로 유유히 이어지며 젊은 여성들을 무협의 세계로 유혹한다.

시작은 대성국의 군사지도인 산하도 도난 사건이다. 대성국은 위녕후가 황제를 위협하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으며, 장군인 정안후가 유일하게 황제의 편에서 버티고 있다. 정안후가 가지고 있던 산하도를 도난당한 것이 알려지면 황제를 노리는 위녕후의 야욕이 실현될 것이다. 무림의 정보가 모두 흘러드는 산수도의 종주 문사연은 산하도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문사연은 무림의 최대 문파 정양궁의 제자 심만청과 은장가, 실력 좋은 도둑 비구아, 그들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방외곡의 소곡주이며 의원인 좌경사를 한 팀으로 구성한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에서 미션수행을 위해 마법사, 검사, 도둑 등으로 팀을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이 산하도를 찾기 위해 서역땅으로 가서 무공이 뛰어난 악당 집단 설역삼마와 힘을 겨루는 등 초반에는 충실하게 볼거리가 펼쳐진다.


'일촌상사'는 주인공인 좌경사가 대성국의 기밀이 담긴 도난당한 지도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웨이브 제공

'일촌상사'는 주인공인 좌경사가 대성국의 기밀이 담긴 도난당한 지도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웨이브 제공


무협물에서 절대고수의 성장, 무림의 배신과 음모가 주된 이야기라면, 역사물에서는 한 나라의 권력을 둘러싼 골육상쟁이나 국가 간의 치열한 전략과 전투를 보여준다. 개인으로 싸운다면 무림 고수가 최고지만 전투나 전쟁을 벌인다면 훈련된 군대의 공격을 무림의 한 문파가 당해낼 수 없다. 총과 대포가 있는 근대에는 군이 압도적 우위에 있다. 무협물에서 무림과 국가는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공존하는 형태로 보통 그려진다. 무림은 일종의 가상공간처럼 나온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 원과 명의 교체기를 배경으로 무림이 원의 건국에 약간 공을 세우는 것처럼, 일종의 대체 역사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일촌상사'는 가상의 국가를 내세우면서, 무림과 국가가 얽히는 양상을 보여준다. 정양궁의 금허진인은 위녕후의 군사를 이용해 무림의 문파를 몰살하고, 무고한 고수들을 살인자로 몰아 무림 맹주가 될 수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그들은 서로 이용한다. 정안후의 아들인 좌경사는 무림의 일원이지만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녹정기'의 위소보처럼 몸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천하를 뒤흔드는 캐릭터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좌경사는 위녕후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무림도, 국가의 일원도 아니기에 더욱 유연하고 파격적으로 사고해 위기의 순간마다 역전에 성공한다.(하지만 억지도 많다) 국가와 무림이 얽히면서 끝없이 사건이 벌어지고,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 전개는 '일촌상사'를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좌경사는 지도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남장을 한 여인 소운락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웨이브 제공

좌경사는 지도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남장을 한 여인 소운락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웨이브 제공


그리고 '일촌상사'는 '나의 소녀'라는 부제에 더욱 힘을 싣는다. 비구아는 남장여인 소운락이고, 어린 시절 좌경사와 만난 적이 있다. 대성국과 고자국의 전투 와중에 정안후는 세자를 살리기 위해 좌경사를 미끼로 삼았다. 치명적인 독을 마신 좌경사는 명의가 있는 방외곡으로 가게 되고, 스승인 검마 소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방외곡을 찾은 소운락과 운명적 조우를 한다. 비구아가 소운락임을 한순간에 간파한 좌경사는 이후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숱한 난관을 헤치며 목숨까지 건 모험을 수차례 하게 된다.

좌경사와 소운락의 사랑만이 아니다. 문사연과 심만청의 사랑도 곡절 많기로는 뒤처지지 않는다. 소운락을 짝사랑하는 혈익신교 교주의 아들 주염의 스토리도 애잔하다. 가장 슬픈 사랑의 이야기는 은장가와 사강아다. 어릴 때부터 정양궁에서 자라나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순수하고 강직한 은장가는 사파의 마두로 불리는 무이채 채주의 딸 사강아와 사랑에 빠진다. 사파는 악의 집단이라고 스승과 선배들이 수없이 말했지만, 은장가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는 것만을 따라간다. 주염과 의형제를 맺고, 사강아와 혼약을 한다. 세간의 이념이나 윤리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힘을 믿는다. 그렇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강아의 손을 놓지 않는다. '일촌상사'의 모든 캐릭터는 강렬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관철시킨다. 그들에게 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중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끌리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일촌상사'는 탄탄한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한다. 웨이브 제공

'일촌상사'는 탄탄한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한다. 웨이브 제공


무협물의 최고는 김용이라고 오랫동안 확신했다. 하지만 '일촌상사'를 보고 과거의 나를 질책했다. 김용의 소설은 걸작이지만 이미 시간이 흘렀고, 새로운 걸작 무협지는 이미 많이 있다. '일촌상사'는 무협과 사랑 그리고 궁정의 암투를 아우르며 매력적인 캐릭터가 활약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강력하게 전개한다. '일촌상사'를 보며 만족했고, 중국의 다른 무협 드라마를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설레면서도, 50화가 넘는 드라마들에 다시 빠져들 생각을 하니 두렵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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