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원자로 통한 후진국 빈곤 타파 신념
선거공약도 '정책실패' 배제할 수 없어
탈원전 정책기조에 원숙한 자기성찰 긴요
필자가 서울대학교의 공직을 맡고 있던 4년의 기간 중(2010~2014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2013년 4월 21일 미국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의 만남이었다. 세계초일류 기업의 창업자가 무슨 이유로 한국의 대학을 방문하고 총장실에서 간담회를 갖고자 하는지 의아해 했으나 "'원자력 발전'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대를 방문한다"는 원자핵공학과 주한규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의 지극정성의 집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서울대에서 국내 원자력 전문가들과 소형원자로 개발계획을 협의한 후, 총장실에서 관련 학자들과 집중적 지원방향을 격의 없이 토론했다. 그의 원자력 분야에 대한 관심은 "후진국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개발 낙후지역에 대한 에너지 공급이고, 이것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소형원자로 건설"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빌&멜린다 재단'이 이러한 비전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개도국의 만성적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인류애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실천적 제안은 막연한 개발협력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만 익숙했던 나 자신의 허술함을 깨우쳐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계적 명성에 비추어 그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나 관련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도, 한국을 방문한 것은 우리 학자들이 원자력 분야의 이론과 현장의 경험을 두루 갖춘 '글로벌 선도주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전개되고 있는 반(反)원전운동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소형원자로 사업에 대한 집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원자력 발전을 통한 빈곤퇴치의 확실한 비전이 반원전론자들이 우려하는 일말의 위험가능성을 뛰어넘는 확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한 비공개 강연을 마치고 대학을 떠나면서 나에게 '초청에 감사하고, 재회를 기약한다'는 이메일을 보내는 세심한 배려를 잊을 수 없다. 분망한 일정임에도 자신을 맞아준 사람에게 정성을 쏟는 인간적 자세를 접하면서 그의 무형의 자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8년 전 일을 거론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 탈원자력 정책기조와 기존 원자력발전소 폐기가 중요한 국가정책 의제로 논란을 거듭해오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이러한 탈원전 논쟁에서 모범답안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그의 판단과 집념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청의 소스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원전 관련 정책결정에 있어서 선입견과 편견을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객관적 진실'을 확인하고, 이에 기초하여 정책포지션을 형성하는 원숙한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대한 냉철한 자기평가가 긴요하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논란이나 정치적 손익계산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현 정부 탈원전 정책기조가 후일 '정책실패'의 궤적으로 전개되지 않으려면, 제로베이스(zero-base) 기준에서 객관적 상황을 진단하고 향후 정책방향을 재확인하거나 아니면 수정하는 원숙한 정치적 리더십이 긴요한 시점이다.
어떤 정책이든 실패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뜻을 확인했기 때문에 선거공약은 국민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기확신'의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최근 산업자원부 원전폐기 과정의 감사결과를 둘러싸고 여권 의원들이 '정책선택'의 문제를 감사대상으로 정치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바, 이것은 헌법상 감사원의 역할과 위상을 간과하고 정책선택과 집행의 무흠결성을 과신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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