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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입력
2021.03.07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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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출간을 앞둔 책의 추천사 청탁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한 일간지에서 시작된 기획으로, '나를 바꾸고 키워준 단 한 명의 환자'라는 주제로 의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구성의 책이었다. 처음 6회로 시작되었던 기획은 간호사, 요양보호사, 응급구조사 등 다른 의료진까지 참여해 80회가량 연재되었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사면서 국내에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이야기부터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한 마취과 의사는 밤중에 찾아온 의식불명의 피투성이 환자를 마주한다. 구조 요원과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8층에서 뛰어내렸다고 진술했다. 환자는 얼굴을 심하게 다쳤고 전신에 부서지지 않은 뼈가 없었다. 의료진은 그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병원의 모든 외과계 의사가 불려 나와 24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했다. 수술을 마친 뒤에도 환자는 6개월이나 중환자실 병상에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 과정을 바라보던 마취과 의사는 회의감이 들었다. 자살을 기도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의료진과 의료 자원이 투입되는 일이 과연 옳은지, 혹은 처음부터 그녀의 의지대로 순순히 생을 마감하는 게 순리가 아니었을지.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의식을 회복하고 삽관을 제거한 그녀의 첫 마디는 놀라웠다. 남편이 자신을 8층에서 밀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인 미수의 유일한 증거가 되었고 남편은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생(生) 하나에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밝혀지지 못했을 진실이었다.

이후에도 진심 어린 사연이 이어졌다. 하나의 사연은 곧 현재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었다. 아픈 사람들을 오래 접하며 생각해왔기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나는 책의 서두에 추천사를 길게 적었다. 처음으로 혼자 사망을 선언한 날의 일기였다. 그 혼란스러운 날 오열하는 유가족을 보고 나는 너무 많이 울었다. 바라보던 내과 동료가 앞으로 평생 응급실에서 어떻게 일하겠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 울먹이는 감수성은 내 어딘가에 남아 지금도 진료를 함께하고 있다.

책은 이미 많은 독자를 만났지만, 네덜란드의 의료 환경은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안락사 허용이 대표적인 차이였다. 이 기획을 눈여겨본 한국일보와 우리나라 의료진을 대상으로 의견을 나눴다. 매주 한 편씩 국내 의료진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이번에도 첫 원고를 썼고 주변의 좋은 필진을 추천했다. 그 연재가 지난주 '나를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라는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진심 어린 글을 써줄 주변 의료진에게 하나 둘 연락해 원고를 부탁했다. 받아본 글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사연을 숨기고 있었는지 동료로서도 알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유독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린 회한이 응어리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치열하게 살려내거나 헤아리려고 분투했던 사연 또한 마음을 울렸다.

의사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하지만 그들의 위치는 고통과 죽음이 너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그들은 반복된 감정의 훈련으로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측은지심이 살아 숨쉰다. 의사로서 가장 격한 감정이 찾아왔던 고백은 그래서 더 진솔하고 귀하다. 이 기획으로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간극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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