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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 시간을" 기자에게도 의원실 문턱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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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현실을 보도했는데, 그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만큼 기자들을 비참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한국일보는 지난 1월 ‘중간착취의 지옥도’ 기획기사에서 파견·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임금 착취 실태를 보도했습니다. 한달 수십만~수백만원의 인건비를 중간에서 빼앗기는 이들이죠. 하지만 국회도 정부도 중간착취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에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직접 법 제·개정을 요구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여정을 담은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를 비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무려 23년이 흐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파견·용역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인건비를 중간에서 떼이는 중간착취가 공고해졌죠. 이들의 비명과 눈물이 노동시장 최하부에 흘러넘쳤습니다. 현재도요. 그런데도 국회와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간접고용 노동자는 자신들을 대표해줄 이익단체도, 노조도 없으니까요. 일부 국회의원들이 개별적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속절없이 실패해왔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목을 끄는 사안도 아니고, 기득권층의 이익과도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중간착취의 지옥도’ 시리즈로 내보냈던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 기자들이 한번 나서보기로 했습니다. 일종의 ‘입법로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첫 대상은 국회입니다.
국회로 향한 여정을 소개하기 앞서, 보여주고 싶은 메일이 두 개 있습니다. ‘중간착취’ 문제를 보도한 후 독자들의 메일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 잊히지 않는 메일입니다.
“‘원청에서 받은 돈의 몇 % 이상은 떼 가면 안 된다’ 하는 법적인 기준이 없으니까 사장한테 따질 수도 없어요. 울화통이 터지는데 방법이 없어요.” (용역노동자 A씨)
취재하며 가장 놀랐던 부분도 중간착취 대부분이 ‘합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용역업체는 원청에서 얼마를 받든 노동자에게는 최저임금만 주면 그만입니다. 수백만원을 떼어가도 법 위반이 아닙니다. 고(故) 김용균씨가 일했던 용역업체가 그의 월급(211만원)보다 더 많은 311만원을 중간에서 착복해도 불법이 아닌 현실, 우리는 왜 이걸 내버려 두고 있는 걸까요.
또 하나의 메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사들이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면 언젠가는 국회의원 귀에, 대통령 귀에 들어가겠지요?” (가족이 용역노동자인 B씨)
‘언젠가’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국회의원 ‘귀’에 대고 말해보기로 했습니다. “중간착취 법을 만들자”고요. 당장요. 23년,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취재가 아닌 입법을 위해 국회를 방문해본 적이 없기에, 국회가 입법 제안에 얼마나 열려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노동 관련 법안을 발의하고 심사하는 국회 상임위원회는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입니다. 취재팀은 환노위 소속 15명(총 16명 중 법무부 장관인 박범계 의원 제외)의 의원실에 가서 ‘중간착취 금지 입법 질의서’를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첫 단계는 각 의원실 방문 일정 잡기. 보좌진들에게 연락해 방문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방문 날짜를 정하지 않았는데도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는 건 어렵다는 의원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에 보좌진에게 질의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조율했지만, 보좌진을 만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한 의원실도 3곳(20%) 있었습니다. “5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지만 “이메일로 질의서만 달라”고 했습니다.
압니다. 이마저도 기자여서 가능한 일입니다. 기자이기에 보좌진 연락처를 쉽게 구했고, ‘방문하고 싶다’는 말도 당당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권’을 가진 기자들에게 조차 낮지 않은 문턱이라면, 일반 국민들에겐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요.
더불어민주당 젊은 의원 7명이 진행하는 ‘국회의원 시키신 분’이라는 국민 입법 제안 프로젝트를 보면, 의원들도 국회 문턱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짜장면 시키듯 쉽게 입법을 제안하라는 취지죠. 홍보 영상에서 의원들은 전화를 직접 받고, 현장으로 뛰어갑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가 있는 거겠죠.
지난달 24일. 국회 정문 앞에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등의 피켓을 든 사람들, 천막농성을 하는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법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국회의원 귀에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나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취재팀 역시 취재가 아닌, 우리 목소리를 내기 위해 국회에 온 것은 처음이라 더 긴장됐습니다.
국회의원 300명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10층 건물인 ‘의원회관’ 출입은 까다로웠습니다. 만남을 약속한 의원실에서 하루 전날 방문자를 출입 등록해줘야만 방문증을 받을 수 있었고, 해당 의원실이 있는 층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의원회관에 방문한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방문증을 받았습니다. 방문자들은 말끔한 정장 차림에 서류 뭉치를 든 남성들이 많았습니다. 의원회관 내부 복도에서도 다른 방문자들과 마주쳤습니다. 한 남성은 양쪽에 선 남성 두 명이 외투를 벗겨주며 수행하고 있었고, 대기업 로고가 박힌 빳빳한 종이가방을 양손 가득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며 법에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있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룰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다닐 여력이 되는 사람, 의원실의 방문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의원회관에 드나들수록, 저희가 취재했던 간접고용 노동자가 직접 의원실에 찾아와 부당함을 호소하고, 법 개정을 요구하는 풍경은 잘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취재팀은 지난달 24~26일 3일 동안 12곳의 의원실에 방문해 질의서를 전달했습니다. 나머지 3곳은 직접 방문을 거절당해 서면 질의로 대신했죠. 질의서에는 4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노동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중간착취를 막기 위한 법 개정안과 제정안을 정리한 것입니다. 직접고용도 좋은 방안이지만, 간접고용 상태에 남아 있더라도 중간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안전망’을 깔아주는 법안에 집중했습니다.
※ 중간착취 금지 입법 제안 질의서 (요약)
1.인건비는 원청이 용역 근로자에게 전용계좌를 통해 직접 지급하도록 법제화
2. 파견업체가 떼는 수수료 상한을 정하고, 노동자에게 수수료를 공개하도록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
3. ‘사용자’의 정의를 확장해 원청도 임금 등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책임을 지도록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정
4. 중간착취 금지 등 간접고용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법 제정
질의서를 받은 12곳 의원실은 문제의식에는 대부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법제화 방법, 사회적 합의, 부작용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줬습니다.
특히 의원 4명은 직접 취재팀을 만나줬고,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개 법안 모두 적극 공감하며 입법에 참여하겠다”고 밝혔고, 강은미 정의당 의원과 장철민 민주당 의원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은 “보호 법안은 필요하지만 폭넓은 법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네 분 모두 중간착취 문제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환노위 소속 15개 의원실은 이달 12일까지 질의서에 대한 공식 답변을 줄 예정입니다. 한국일보는 답변서를 취합해 의원들의 개정안 발의에 적극 협조하고, 이 과정 역시 보도할 계획입니다.
취재팀은 의원실에서 여러 번 이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 고질적인 문제인데다 사회적인 관심도 적은 중간착취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자의 역할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까지입니다.
실제로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은 국회의원의 일입니다. 간접고용 노동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고 법을 촘촘히 뜯어고친 국회의원이 이 칭찬의 주인공이 돼야겠죠.
“좋은 법 만드셨네요.” 하루빨리 이 칭찬을 돌려드릴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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