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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의 사냥그림, 조선에서 유행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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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작년 9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김홍도파 호렵도(胡獵圖) 팔폭병풍이 출품된다는 보도는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정조(1752-1800) 때 김홍도가 호렵도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전할 뿐, 아직 실물로 확인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병풍은 1952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화여대 교단에 섰던 캐슬린 크레인(Kathleen J. Crane) 박사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미국의 한 개인이 갖고 있다가 경매에 출품한 것이다. 실물을 조사해 보니, 김홍도의 작품은 아니지만 김홍도 그림에 가장 가까운, 정조 때 화원이 그린 호렵도 명품이었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이 병풍을 매입했고,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수렵도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고구려인의 수렵 장면을 그린 수렵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림으로, 무용총 수렵도가 유명하다. 둘째는 원나라(元, 1330-1374)의 수렵 장면을 그린 수렵도다. 고려 말 공민왕(1330-1374)이 그린 천산대렵도가 대표적인 예다. 세 번째로는 청나라(淸, 1616-1912) 황제가 내몽골 무란웨이창(木蘭圍場)에서 수렵하는 장면을 그린 호렵도가 있다. 김홍도파 호렵도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동안 호렵도는 원나라의 사냥 장면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이상국 박사의 연구에 의해, 원나라가 아닌 청나라 황제의 사냥 장면임이 밝혀졌다. 그런 사실은 이 병풍의 주인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폭 중 청색 가죽옷인 행괘(行?)를 입은 인물을 보면, 곤룡포처럼 가슴과 어깨에 용 문양이 그려진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청나라 황제임을 보여준다. 아울러 주변 인물들의 옷이 청나라 복식이고, 깃발과 같은 의장도 청나라 황제의 행렬임을 시사한다.
청 황제들은 강희제 때부터 여름을 열하의 비슈산좡(避暑山庄)에서 보내고 가을에는 그 북쪽 내몽골 무란웨이창에서 사냥을 했다.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수천명의 군사들이 동원됐고, 몽골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겸했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아 가을사냥을 적극적으로 시행했고, 그 내용을 '목란도'를 비롯해 여러 기록화로 남겼다. 호렵도는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담은 그림이다.
황제의 수렵도에 야만적이고 미개하다는 느낌의 오랑캐 호(胡)자를 붙인 이유는 뭘까. 왜 조선에서는 청나라 사냥그림을 그린 것일까. 1636년 청나라는 조선을 침범했고, 조선은 청의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우리는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도 호렵도처럼 오랑캐 호자를 붙여서 청을 낮춰 불렀다.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청을 쳐부수자는 북벌론까지 제기됐다. 백년이 넘게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청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의해 세계 강국으로 떠올랐다.
조선에서는 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북학파로 불리는 실용적인 성리학자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중국을 계승한 나라로 인정하고 청나라의 학술ㆍ문물ㆍ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조는 한편으로 배청의식에 공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청이란 현실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양면 정책을 펼쳤다. 역사적 아픔과 현실적 필요를 아우른 선택이었다. 호렵도란 명칭에는 청에 대한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조선인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조선과 청의 관계는 1780년 여름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계기로 개선되어 갔다. 정조는 열하에서 열린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을 전격적으로 파견했다. 청나라에 보내는 정규 사행이 아니라 특별 사행이었다. 이때 정사인 박명원을 수행한 박지원이 그 경위를 기록한 기행문이 그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건륭제는 이전과 달리 조선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했고, 정조 역시 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정조는 문화와 무예의 두 부문에서 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호렵도는 청나라의 무예를 그린 인물화이고, 책거리는 청나라의 문물을 가득 담은 정물화다. 두 그림 모두 정조의 북학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그림은 정조가 가장 아꼈던 화원인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들여온 호렵도 팔폭병풍은 김홍도의 호렵도는 아니지만, 김홍도의 호렵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 주목을 끈다.
이 호렵도 병풍은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가운데 비교적 제작 시기가 이르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정조 때 화원들이 즐겨 그렸던 화풍이 보이고 인물과 산수의 표현이 조화로운 작품이다.
호렵도 팔폭병풍의 산수 배경은 웅장하면서 율동적이기도 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팔폭병풍은 폭포가 내리꽂고 원숭이들이 노니는 깊은 산에서 시작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식으로 높이를 알 수 없는 산에서 출발해 아기자기한 리듬을 보인 형세는 너른 평원으로 잦아든다. 산을 배경으로 삼아 등장한 청나라 황제와 황제 여인의 행렬은 장엄하다. 평원에서 말을 탄 사냥꾼들의 사냥 장면은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 병풍은 청 황제의 행렬에 초점이 맞혀져 있다. 팔폭병풍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6개의 화폭에 청나라 황제와 황제 여인의 행렬 장면이 그려졌다. 나머지 2폭에는 말을 타고 활, 당파(??), 연추(?錘) 등의 무기를 사용해 호랑이와 사슴을 사냥하는 청나라 마상무예를 간단하면서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여진족은 말을 타고 활과 무기를 사용하는 기마술에 능숙한 민족이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마상무예에 호되게 당한 아픈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국방개혁에 힘쓴 정조가 청나라 황제의 사냥행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황제와 황제 여인 행렬 사이의 사냥꾼들 모습은 흥미롭다. 어떤 이는 화살의 곧음을 살피고, 어떤 이는 나무에 앉은 새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매 사냥꾼은 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개가 말등에 아슬하게 타고 있다. 아래의 두 사람은 나발과 동각을 불어 황제 일행의 행차를 알리고, 그 사이에 표피를 입은 이는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연상케 할 만큼 등장인물들의 역할과 표정이 다양하고 해학적이다.
나무나 산의 표현은 김홍도의 작품을 닮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의 끝을 물이 오른 듯 둥글게 표현한 방식은 김홍도 화풍을 연상케 한다. 성기고 빽빽함이 조화로운 산의 표현도 김홍도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하지만 얼굴을 서양화 식으로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옷 주름을 강한 억양으로 나타낸 점은 기존의 김홍도 그림에서 보이지 않은 표현이다. 이 병풍을 김홍도가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김홍도가 활동했던 정조 대 도화서 화원의 작품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숙제다.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와 달리, 이 병풍은 특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중심적인 인물은 채색기법으로, 부수적인 산수 배경은 수묵 기법으로 표현했다. 한 화면에 두 가지 다른 기법을 사용했지만, 서로 다른 기법이 부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강약이 분명하고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정조시대 산수화와 인물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청나라의 사냥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낯설지가 않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청나라 황제의 사냥 장면을 조선식으로 표현한 데서 나타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청나라 식으로 나타냈고, 나머지 부분은 조선식으로 바꿨다. 이는 북학을 진행하면서도 자존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정조시대 외래문화의 수용 태도와 다름이 없다.
회화는 정직한 역사자료다. 이 호렵도 팔폭병풍은 북학으로 비롯된 정조시대 청나라와의 달라진 외교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거리와 더불어 북학의 상징성을 지닌 그림이다. 우리가 이 병풍을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자료로서의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정조시대 도화서 화원의 높은 예술성으로 승화시킨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이 병풍은 우리에게 정조시대 역사와 예술의 아름다운 만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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