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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와 다른 것

입력
2021.03.09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998년 2월 당시 한국일보사 박병윤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김수환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 마련된 접수창구에 금을 내놓고 있다. 왕태석 기자

1998년 2월 당시 한국일보사 박병윤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김수환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 마련된 접수창구에 금을 내놓고 있다. 왕태석 기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던 20여 년 전 전 국민을 울게 만들었던 한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 홍보부가 직원 교육용으로 만든 이 비디오에는 당시 명예퇴직을 당한 2,000여명 은행원들의 퇴직 소감과 현직에 남아있는 동료들에 대한 절절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구조조정을 이미 당했거나, 또 언제 당할지 모르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퇴직 은행원들의 얘기는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제일은행 직원뿐 아니라 이 비디오를 보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비디오 제목도 '눈물의 비디오'가 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신문엔 IMF가 비교 대상으로 자주 소환된다. 한국경제가 지난해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도 IMF 이후 `처음`이고, 취업자 수 감소폭도 IMF 이후 `최악` 수준이라는 식이다. 코로나 사태로 지금 경제가 IMF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비교다.

하지만 이런 보도는 취약계층에만 더 가혹한 코로나 사태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IMF 때는 벌이 면에서나 안정성 면에서나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은행원도 수천명씩 감원을 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로나19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항공, 여행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는 대기업 중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대기업은 위기만 피한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금융권은 주식시장 활황과 대출 급증으로 최고 수준의 실적을 올렸고, 비대면 산업의 발달 등으로 IT 업종과 배달 앱 기업들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반면 사회의 약한 고리로 불리는 취약계층은 유난히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난해 내내 발표된 주요 경제지표는 '취약계층이 일자리도 가장 많이 잃었고, 벌이도 가장 많이 감소했다'는 것을 줄곧 얘기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장기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폐업 위기에 내몰린 자영업자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취약계층의 이런 아픔을 20여 년 전과 다르게 지금 우리 사회는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주식 투자를 해 단기간에 자산을 불린 사람에게는 코로나19가 위기일 수만은 없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으로 부동산 투자를 한 사람에게도 자영업자의 아픈 사정은 남의 얘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대문 시장을 가보면 썰렁한 거리에 문 닫은 점포가 한둘이 아닌데, 그 옆 대형 백화점에서는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월세를 내지 못해 폐업한다는 소상공인 얘기 뒤로, 경쟁사보다 성과급이 적다는 이유로 회사에 불만을 표하는 대기업 직원의 소식도 함께 들린다. 우리 사회 주요 문제로 거론되던 양극화 현상이 코로나19 사태로 더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20여년 전 위기와 아픔을 공유한 우리 국민은 장롱 속에 있던 금과 달러를 들고 은행으로 향했다. 꼭 그 금과 달러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비교적 빠르게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국가별 백신 접종이 본격화된 만큼 코로나 사태도 올해나 내년에는 종식될 거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남긴 양극화라는 후유증은 어느 경제 위기보다 더 길고 아프게 우리 사회를 괴롭힐 것만 같아서 우려스럽다.

민재용 정책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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