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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의 거리에서 부르주아의 욕망을 감지한 예술인

입력
2021.03.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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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피에르 파졸리니

파졸리니 죽음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it.wikipedia.org

파졸리니 죽음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it.wikipedia.org


조국 이탈리아의 현실과 계급·권력관계의 이면을, 절망에 닿을 듯한 냉소의 미학으로 예술화한 시인이자 영화인 피에르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3.3.5~ 1975.11.2)는 '68혁명' 와중에 자신을 우러르던 청년들이 아니라 방패를 든 거리의 경찰을 옹호했다. 그는 제도로서의 경찰(공권력) 너머 가난의 자식들이라는 그들의 실존을, 유년기부터 보아온 슬로베니아 국경 프리울리(Friuli) 이웃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유를 외치는 청년들에게서 부르주아의 욕망, 권력재생산의 욕망을 보았다. 그는 노동자계급과 유대 없는 학생들의 외침에서 진정한 혁명의 징후를 찾지 못했다.

작가 피에르 아드리앙(Pierre Adrian)은 평전 '파졸리니의 길'(백선희 옮김, 뮤진트리)에서 "파졸리니는(...) 학생들은 궁궐을 꿈꿀 뿐임을 잘 이해했다. 집안 좋은 학생들이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는 피아트나 지멘스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를 해봤자 소용없다. 그들은 결국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유력인사들이 될 것"이라던 그의 생각을 대변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이던 그는 동성애자란 이유로 1949년 당에서 축출되고 중등학교 교사직도 잃었지만, 평생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 영화인으로서의 경험과 학습으로 체득한 사회주의적 분석과 전망을 고수했고, 이를 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그는 파시스트 군인 아버지와 농민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머니의 이웃들과 함께 자랐다. 예술가로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파시즘 혐오를 넘어 권위와 체제에의 저항으로 심화하고, 물질문명과 위선에 대한 지독한 혐오로 확산됐고, 그것들을 문학과 비평과 영화로 고집스레 구현했다. 그는 가톨릭-파시스트 정치-신분귀족 권력의 변태적 욕망을 충격적으로 고발한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을 완성한 직후 한 청년에게 피살당했고, '범인'(2017년 작고)은 1983년 가석방 직후 진범은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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