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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주점 하나가 '쇠락의 길 걷던' 골목상권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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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이런 가게가...'
큰길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고개로 발길을 돌리면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카페, 액세서리 가게, 사진 스튜디오를 만난다. 골목 구석구석 자리 잡은 가게들은 젊은 감성을 물씬 풍긴다. '청년의 언덕'으로 불리는 강원 춘천시 육림고개. 주름 낀 건물들이지만 밝고 경쾌한 파스텔톤으로 화장한 점포들은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속삭인다. 이미 젊은이들 사이서는 '핫 플레이스', 서울 사람들도 끌어다 앉히는 묘한 매력의 가진 곳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언덕 위 루프탑 카페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면 육림고개는 변신한다.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까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수십년 세월을 보낸 노포들이 내뿜는 참기름, 강냉이 내음까지 더해진다. 과거와 현재, 젊음과 노련함이 공존하는 언덕이다.
육림고개는 춘천 시내 도심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 문전성시를 이루던 육림극장 옆에서 고개가 시작돼 중앙시장까지 이어진다고 해 '육림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춘천 토박이 김주현(55)씨는 "육림고개는 인근 닭갈비 골목과 명동거리, 중앙시장과 함께 주말이면 고개에 사람들이 꽉 들어찰 정도로 지역을 대표하는 상권이었다"며 "어머니를 따라 일요일이면 장을 보러 나왔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그의 얘기처럼, 40여년 전 육림고개엔 좁은 오르막을 따라 옷가게와 음식점, 생선가게, 노점상이 줄이어 자리 잡고 있다. 춘천시청 옆 소양극장(피카디리)과 함께 개봉관 역할을 하던 육림극장엔 새 영화 상영을 시작하는 주말 오전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경쾌한 디스코 음악이 울려 퍼지는 육림극장 옆 롤러스케이트장은 이른바 '쎈언니'와 형님들이 자주 찾는 젊음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구도심 공동화를 피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춘천 퇴계동과 애막골 택지개발로 인구가 대거 이동해 신흥 상권이 형성된 탓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들어선 대형마트가 등장하자 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더구나 한 곳에서 여러 영화를 볼 수 있는 멀티플렉스 등장으로 어렵게 버티던 육림극장마저 2006년 가을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상인들이 하나둘 떠났다. 흥정이 오가던 가게는 사람의 손길이 끊긴 을씨년스러운 폐가로 변했다. 침체는 10년 가까이 길게 이어졌다. 육림고개는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과거가 되는 듯했다.
반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막걸리가 큰일을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봄 춘천시가 육림고개 내 빈 점포를 활용해 연 막걸리 주점인 '서민 주막촌'이 침체한 상권을 살리는 계기가 됐다.
퇴근 시간 무렵 막걸리와 빈대떡, 두부구이, 도토리묵 등 안줏거리들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간 것과 같은 아날로그 감성을 빚어냈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에 지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당시 최동용(69) 전 춘천시장과 실무진은 이듬해부터 청년들을 대상으로 창업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추억이 가득한 육림고개라는 공간에 젊은 감성을 불어넣어 문화상품을 만들고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보자"는 취지였다.
춘천시의 아이디어는 중소벤처기업부 공모에도 선정되면서 힘을 받았다. 시는 창업교육은 물론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까지 지원하며 젊고 끼 많은 전국의 청년사업가 20명을 모셔왔다.
결과는 대성공. 젊은이들이 텅 빈 골목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낡은 건물에 화려한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주택 옥상은 전망 좋은 커피숍과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거미들의 놀이터였던 벽면에는 익살스러운 벽화가 그려졌다. 청년상인이 들어와 빈 상가를 조금씩 손보자 거리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젊은 감성이 묻어나는 SNS 홍보를 통해 입소문을 타자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왔다. 지상파TV는 물론 케이블방송사들도 앞다퉈 육림고개 청년몰을 카메라에 담았다.
육림고개에 둥지를 튼 점포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상품을 내놓고 손님을 맞고 있다.
식빵에 천연색소를 담아낸 예쁜 빵을 비롯해 보기만 해도 식욕이 살아나는 경양식, 젊은 셰프의 개성이 돋보이는 퓨전 짬뽕 등 중화요리점은 SNS 스타나 다름없다. 임혜진(37·서울 서초구)씨는 "옛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며 이벤트와 볼거리, 식사, 디저트까지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느니 이만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젊은 셰프의 가게 사이에 고소한 풍미가 가득한 강냉이, 닭강정 등 추억의 맛을 파는 노포(老鋪)가 어우러진 육림고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식도락 여행지다. 뻥튀기 사장님으로 잘 알려진 강재선(70)씨는 "몇 년 전 젊은 친구들이 들어오자 시장 골목에 활기가 넘치고 유동인구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미소를 지었다.
블로거 이현지(33)씨는 "맛집 사이에 자리한 도자기 캔들(양초) 숍과 네일아트, 일러스트, 사진 스튜디오 또한 추억을 남기기 제격"이라며 "오감이 만족하는 여행지"라고 소개했다.
춘천시는 육림고개 상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지난 2018년 8월 골목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11월엔 미리 크리스마스를 열어 볼거리를 제공했다. 2019년과 지난해 10월엔 서울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핼러윈 행사를 개최해 눈길을 끌었다. 봄, 가을에 열리는 육림고개 일원에서 개회한 플리마켓도 저렴하고 질 좋은 상품과 흥겨운 이벤트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한때 10여곳에 불과했던 점포 수가 지난해 말 69개까지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주말 하루 평균 2,000여명이 육림고개를 다녀갔다. 유명 뮤지션인 나얼의 팬 카페에선 춘천시청 앞 레코드점인 명곡사와 함께 육림고개를 춘천 여행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다. 후미진 시장 골목은 볼거리가 가득한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큰돈 들이지 않고 성과를 낸 육림고개 프로젝트는 도시재생 측면에서도 모범사례다.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재개발과 재건축 없이 상권 활성화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법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안양시의회 등 전국 지방의회와 지자체가 육림고개를 벤치마킹하려는 이유다. 김주원(60) 상지대 사회적경제학과 교수는 "육림고개의 경우 지자체의 지속적인 지원에 사람 중심의 콘텐츠가 채워져 골목상권 부활이란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춘천시와 상인들은 고객쉼터를 마련하고 마케팅 전략을 다듬으며 코로나19 위기에 맞서고 있다.
무엇보다 육림고개와 약사명동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연계해 중앙·제일시장과 시너지효과를 내는 것이 목표다. 춘천교육지원청이 이전한 자리에 마을복합커뮤니티센터를 조성하고 청년창업을 지원할 시설도 마련할 계획이다. 강원도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 등으로 기존 주민과 상인이 쫓겨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도시재생사업지구를 면면히 모니터링할 계획이다.
박민규(45) 춘천시 사회적기업담당은 "청년몰과 지역 내 상인들이 함께하는 라이브 커머스를 비롯해 온라인 배송, 키오스크(무인 주문 단말기)를 보급하는 등 마케팅 지원에 나설 계획"이라며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육림고개를 찾아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고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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