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팀 쿡 애플 CEO가 자체 설계한 중앙처리장치(CPU)인 ‘M1’ 반도체를 꽂은 노트북과 데스크톱을 처음 발표했을 때만 해도 세상의 반응이 뜨겁지 않았다. 애플은 1994년에도 IBM, 모토로라와 함께 ‘파워PC’라는 CPU를 내놓은 적이 있어서 M1의 등장이 새삼스럽지 않다.
결정적으로 애플은 전 세계 컴퓨터 시장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시장 조사업체 넷마켓셰어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애플 컴퓨터는 4.2%에 불과하다.
그런데 석 달 사이 사람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M1을 장착한 ‘맥북 프로’, ‘맥북 에어’ 등 애플 노트북을 사용한 사람들의 극찬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이제 이 제품들을 사려면 물건이 없어서 2주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가 됐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놀라운 성능이다. 장시간 사용해도 배터리 소모가 적은 데다, CPU와 메모리, 저장장치에 무리를 줘 노트북으로 쉽게 하기 힘든 영상 편집과 화상회의 등 고된 작업들이 부드럽게 돌아가며 소음이나 발열도 적었다. 게임을 제외하고 데스크톱에서 하는 웬만한 일들을 애플 노트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애플 컴퓨터가 공인인증서에 필요한 액티브X를 지원하지 않아 금융사이트 등을 이용하기 힘들었지만 이제 액티브X도 사라졌고 많은 인터넷 서비스들이 웹 기반으로 바뀌어 애플 컴퓨터로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비결은 애플의 반도체 설계 기술이다. 애플은 아이폰에 탑재한 ARM의 기술을 바탕으로 이번 M1 칩을 직접 설계했다. 이를 대만 TSMC에서 5나노미터(㎚; 1㎚=10억분의1 미터) 공정으로 생산했다. 미세 회로인 5㎚ 공정으로 나온 컴퓨터용 CPU는 처음이다. 컴퓨터 CPU의 절대 강자 인텔은 아직 7㎚ 공정 CPU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애플이 2012년 자체 설계한 스마트폰용 A6칩을 아이폰에 처음 장착한 뒤 근 10년 만에 이룬 성과다.
애플의 성과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스마트폰과 MP3 등 일부 영역에서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였던 애플이 이제 컴퓨터에서도 게임 체인저가 되려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애플은 스마트폰 반도체와 컴퓨터 CPU의 통합을 빠르게 시도할 것이다. 이를 통해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들을 겨냥해 스마트폰처럼 빠르게 켜고 끄고 바로 앱을 실행할 수 있는 노트북과 데스크톱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 앱을 컴퓨터에서 그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이미 M1 노트북을 사용한 사람들은 “스마트폰 같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벌써 M1보다 성능이 개선된 M1X라는 차세대 CPU를 개발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그동안 노트북과 데스크톱만큼은 절대 우위를 자신한 윈텔(윈도 운영체제와 인텔 CPU를 장착한 컴퓨터 업체들) 진영은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은 셈이다. 비단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위기만은 아니다. 삼성전자 LG전자 HP 델 등 수많은 노트북과 데스크톱을 만드는 기업들의 공통된 위기다.
물론 애플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M1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기존 기업과 개인들이 사용하던 윈도용 소프트웨어 데이터도 호환돼야 한다. 광드라이브 등 주변기기를 쉽게 늘리기 힘든 애플 특유의 폐쇄성도 벽이다. 또 수많은 이용자를 확보한 컴퓨터용 게임들도 무시할 수 없다. 이를 애플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빠르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게임 체인저의 성패가 달려 있다.
애플의 시간은 곧 윈텔 진영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 윈텔 진영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더불어 휩쓸려간 피처폰처럼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노트북과 데스크톱을 사용하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제품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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