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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 ‘15분 도시’ 파리처럼 보행자·자전거 천국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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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에게 도시는 살기도(live), 사기도(buy) 어려운 곳이 되고 있습니다. 부동산은 치솟고 거주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이런 불평등과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도시 전문가의 눈으로 도시를 둘러싼 여러 이슈를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진유 경기대 교수가 <한국일보> 에 3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16> 15분 도시와 공간민주주의
파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를 목표로 ‘15분 도시(La ville du quart d’heure)’를 내걸었다. 파리 어디에 살든 직장, 학교, 시장, 공원과 같은 중요한 시설에 도보나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안 이달고 파리시장은 다소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캐치프레이즈로 많은 파리지앵의 지지를 받아 2020년 재선에 성공했다. 세계의 많은 도시계획가와 시장들도 파리의 계획을 지지하고 동참하고 있다. 서울도 ‘걷는 도시, 서울’ 정책이나 ‘간선 급행 자전거도로 계획’을 통해 보행자와 자전거가 일상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계획 중이다. 과연 서울도 15분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어떤 준비와 전략이 필요할지 살펴보자.
파리의 ‘15분 도시’가 갑자기 등장한 개념은 아니다. 2000년대 말부터 시작한 포틀랜드의 ‘20분 동네(20-Minute Neighborhood)’와 맥을 같이한다. 프랑스어로 도시를 뜻하는 Ville는 ‘동네(마을)’라는 의미도 있는데, 1920년대 후반 미국 도시계획가인 페리가 동네 생활권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페리는 하나의 동네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 범위를 도보 5분 거리인 반경 400m로 설정하고 근린주구(Neighborhood unit)란 이름을 붙였다. 근린주구에 새 이름을 붙이자면 ‘5분 동네’라 할 수 있다. 페리의 근린주구는 미국 도시설계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으며 우리나라에도 건너와서 각종 도시계획에 적용됐다. 일산신도시 아파트단지 중에는 ‘OO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은데, 바로 페리의 동네생활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달고의 15분 도시는 페리의 근린주구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전자는 후자보다 반경이 3배 더 길어 면적은 9배 더 넓다. 다시 말해 5분 동네가 9개는 있어야 15분 도시의 공간을 채울 수 있다. 그러므로 근린주구에서는 초등학교나 상점과 같은 일상생활 편의시설 접근성만 고려해도 되지만 15분 도시에서는 직장이나 병원과 같은 핵심적인 시설의 접근성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페리는 도시공간에서 통근이나 종합병원 같은 중심시설 이용은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동네 안에서만 보행을 고려했다. 반면 15분 도시는 대부분의 일상 생활이 자동차 없이 가능한 도시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파리는 2024년까지 모든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분 도시는 일상생활의 필수 이동수단으로 여겨진 자동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핵심이다. 직장과 학교, 병원, 시장을 자동차 없이도 15분 내에 이용할 수 있는 도시, 얼마나 매력적인가. 통상 건강한 성인의 보행속도는 1초당 1.2~1.4m 정도이니 15분이면 약 1.2㎞를 갈 수 있다. 걸음이 느린 노인이나 어린이도 있으니 집에서 1㎞ 내에 필요한 시설들을 갖추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15분 도시는 훨씬 넓어진다. 서울의 공유자전거 ‘따릉이’의 평균 통행 속도는 시속 10㎞ 정도로 한강 자전거도로 제한속도의 절반 수준이다. 이런 속도라면 15분에 2.5㎞를 갈 수 있는데, 경복궁에서 시청을 거쳐 서울역까지 갈 수 있는 거리다.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 있다면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강남역까지 15분 내에 갈 수 있다.
서울이 파리와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보행자와 자전거 천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식과 서울의 지형 및 인프라 상황을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서울에서 여전히 보행자는 후순위다. 눈이 오면 차도의 눈은 재빨리 치우지만 바로 옆에 있는 보도는 며칠이 지나도 눈이 쌓여 있다. 그러니 눈이 오면 차를 타야 한다. 평소처럼 걷다가는 낙상하기 십상이다. 강남과 같이 보행자가 많은 도로에서조차 보행자 한 명이 이용하는 면적은 자동차 이용자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차가 막히면 차도를 확장하지만 보행자가 늘어도 보도는 좀처럼 넓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전거 사정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자전거는 통근용보다 여가용에 가깝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려 한다면 차도와 인도를 오르내리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언덕이 많은 동네에서는 자전거타기가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깝다. 날씨도 큰 변수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나 추운 겨울은 자전거 이용이 어렵다. 그러니 서울의 자전거 수송분담율은 2%가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자전거 수송분담율이 높은 네덜란드(2014년 기준 36%)는 물론이고 이웃 나라 일본(17%)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렇게 서울의 현실이 열악함에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서울시 공공자전거의 이용건수가 급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6년 6월 처음으로 월 10만건을 넘은 후 1년 만에 50만건을 돌파했고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10월에는 500만건에 육박했다. 3년 만에 50배가 증가했으니,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더 중요한 변화는 2020년에 일어났다. 계절에 따른 이용률 차이가 많이 줄었다. 일반적으로 추운 겨울(12~1월)에는 가을철인 9~10월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작년에는 이러한 차이가 많이 줄었다. 물론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을 것이나 큰 흐름으로 보면 쇼핑이나 통근과 같은 목적성을 띤 자전거 이용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여가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자전거를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니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보행자와 자전거를 통해 서울이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도시구조와 길을 바꿔야 한다. 우선 몇 개의 중심지에 집중돼 있는 직장과 주요기능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어디에 살든 15~20분 내에 직장과 학교, 공원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골고루 분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간 민주주의(Spatial Democracy)다.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필요한 시설을 근거리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려면 기능을 나누는 것이 필수적이다. 나누기가 잘 되면 차량이용은 물론 불필요한 낭비통행도 많이 줄일 수 있다.
길에서는 자동차 거품을 빼야 한다. 더 넓은 차도는 더 많은 차를 불러 모은다. 차도를 줄이는 ‘도로 다이어트’를 적절히 실행하면 꼭 필요한 차들만 통행하게 된다. 도로에서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이 보행자와 자전거에게 돌아간다. 이런 측면에서 서울시의 ‘걷는 도시’ 정책이나 ‘자전거 고속도로’ 계획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골목길 같은 생활가로까지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을 보행과 자전거로 소화하려면 수시로 주변시설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15분 도시나, 20분 동네가 던지는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같다. 자동차 이용을 줄이고 도시의 공공공간을 더 많은 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줌으로써 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핵심은 어떤 준비와 전략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느냐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외국의 정책을 성급하게 도입하면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우리 시민의 의식수준과 지형, 인프라를 고려한 맞춤형 정책을 만들기 위해 시민과 전문가, 정책당국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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