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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기억, 식빵의 추억

입력
2021.02.24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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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유럽 등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제빵사들이 '식사빵'이란 걸 많이 내놓는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달콤한 빵, 즉 간식빵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설탕은 넣지 않고, 이스트와 소금만으로 반죽한다. 바게트와 캉파뉴, 하드롤 같은 빵을 이른다.

한국에서 처음 빵을 구운 이들은 아마도 서양 출신 선교사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선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1630~1692)이 최초라는 이야기도 있다. 유럽인인 그는 어떻게든 유사 빵이라도 구워 먹었을 것이다. 외국에 나간 한국인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치를 만들어 먹는 것처럼. 어쨌든 유럽이 원산인 빵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이 땅에 이식되었다. 미국산 원조 밀은 빵을 주식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한미 친선을 뜻하는 악수 그림이 포장지에 붙어 있어서 '악수표 밀가루'로 불리던 그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틈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해방이 되자 한국에서 빵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식빵, 크림빵, 단팥빵, 소보루빵 같은 것을 장작과 연탄 가마로도 멋지게 구워냈다.

식빵은 원래 영국식의 식사용 빵이다. 달콤한 간식빵과 구별하기 위해 '식(食)빵'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식빵은 제빵사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빵이었다. 식빵에는 '유지' 즉 기름이 들어가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온 쇼트닝과 마가린, 더러는 '장교 버터'라고 부르는 고급 버터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교 버터는 남대문이나 국제시장 등의 속칭 도깨비암시장에서 암암리에 팔렸다. 식빵은 토스트나 샌드위치가 되었고, 더러는 그냥 설탕이나 사카린을 뿌려 먹는 간식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식빵도 점점 변화해 왔다. 70년대에 크게 성장한 공장빵 업자들은 온갖 빵을 생산하여 동네 식품점까지 배달했다. 제과점이 아닌 식품점에서도 식빵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한국의 제빵 역사는 개인 제빵사들의 가게를 뜻하는 '윈도 베이커리'보다 프랜차이즈가 더 인기를 끄는 특이한 한국적 현상을 만들어 냈다.

식빵은 그냥 덩어리째 뜯어 먹기도 했고, 버터나 마가린을 바르기도 했다. 과거 제과점은 카페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 즉석에서 빵을 먹을 수 있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우유나 오렌지주스를 곁들인 단팥빵, 슈크림빵 등이었다. 가난한 학생들은 맹물에 식빵만을 시켰고, 인정 많은 제과점 사장님은 우유를 한 컵씩 나눠 주는 미담을 쓰기도 했다.

왕년의 식빵 한 봉지는 요즘보다 딱 두 배 컸다. 식구 수도 많았고, 먹성도 좋았다. 현대는 핵가족, 1인 가족이 늘면서 작은 식빵이 주로 팔린다. 자동기계로 썰어서 파는데, 옛날보다 식빵 한 쪽의 두께가 더 두꺼워진 것도 특별한 변화다. 프렌치토스트나 샌드위치를 하기에는 좀 두툼한 것이 보기도 좋아서 그렇기도 하고, 그저 유행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 질감도 달라졌다. 밀의 품질이 좋아지고, 우유와 버터 같은 부재료들이 고급화되면서 더 향기롭고 기름지게 변했다. 우유식빵이니 버터식빵이니 하여 유혹적인 식빵이 쏟아졌다. 요새는 폭신하고 죽죽 찢어지는 식감을 좋아하는 추세에 맞게 한결 '소프트'하고 쫄깃한 식빵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에서 식빵의 역사는 그 가치에 비해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별미에서 주식으로까지 변신한 식빵사(史)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식생활사는 곧 민중사이고, 우리 삶의 흔적을 되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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