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산시성 ① 타이위안 청룡고진과 진사
산시(山西)는 약칭으로 진(晋)이라 한다. 기원전 주나라의 분봉(천자가 땅을 나누어서 제후를 봉하는 일) 당시 이름이 지금껏 굳어졌다. 동쪽으로 허베이, 서쪽으로 산시(?西), 남쪽으로 허난, 북쪽으로 내몽골에 둘러싸여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전국의 상권을 호령한 상인이 등장했다. 이들 상인을 진상(晋商)이라 불렀다. 성의 수도인 타이위안을 시작으로 위츠, 타이구, 치현, 핑야오, 링스, 윈청까지 진상 문화를 찾는 발품 기행을 떠난다. 모두 5편으로 나눈다.
쑥 뜯어 먹던 촌락이 부자 마을로 변신한 사연
기원전 1046년 희발(姬?)이 나라를 세웠다. 주무왕(周武王)이다. 동족이나 공신에게 영토와 작위를 내리는 분봉제를 실시했다. 70개가 넘는 제후국이 생겨났다. 아들 희우는 산시 남부 이청현에 도읍을 정하고 당(唐)이라 했다. 그는 역사에서 당숙우라 불린다. 다시 작위를 계승한 아들 희섭이 진(晋)이라 개칭했다. 당이나 진으로 국호를 정했다면 지역 기반이 비슷했다. 3,000년이 지났어도 약칭은 여전히 ‘진’이다.
성도 타이위안 역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청룡고진(?龍古?)을 찾는다. 북쪽으로 20㎞ 떨어졌는데 1시간 30분이 걸린다. 남문 입구로 들어선다. 마을 이름에 ‘용(龍)’자가 들어 있으니 예사롭지 않다. 정호취(菁蒿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푸를 청과 높을 고 위에 모두 풀 초(?)가 붙었다. 부리 취는 호구지책이니 ‘무성한 쑥’으로 먹고 살았다. 거상 왕승중이 청나라 가경제 때 100만냥을 기부했다. '백만승중' 편액과 함께 청룡을 수놓은 대형 깃발을 하사받았다. 마을 이름이 자연스레 바뀐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내성이 있다. 2층에 진무각(?武?)이 보인다. 깃발 사이로 진무대제가 또렷하다. 도교의 신으로 명나라 이후 민간에게 크나큰 위안이었다. 영락제가 우상으로 승화시키고 자신의 용모를 투영했다. 황제의 은공과 대제의 보우가 하나가 됐으니 어찌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상인도 가업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날마다 빌고 또 빌었다.
진무각 앞 거리에 짐을 실은 말과 상인 조각상이 있다. 왕씨 일가가 거상이 된 사연이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후퇴하던 중 머물렀다. 서둘러 떠나며 큰 짐을 맡겼다. 3년이 지나도 찾지 않으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했다. 이자성은 목숨을 잃었고 3년이 지났다. 짐을 푸니 금은보화가 잔뜩 담겼다. 이를 자본으로 장사를 시작해 거상이 됐다. 복은 드물게 오지만 이렇듯 등장하면 인생 역전이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까지 가업이 이어졌다. 관광객들이 상인 조각상의 손을 하도 만져 반질반질하다. 글을 파는 작가라 해도 인증하지 않을 수 없다.
진무각 아래 성문으로 들어서니 등산루(?山?)가 나타난다. 철로 만든 부처가 용 문양의 보좌에 앉았고 삼면 벽에 등잔이 잔뜩 놓였다. 설날과 같은 명절에 등불을 켠다. 불빛이 모두 반짝이면 장관이겠다. 건너편에 대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니 목조각 하나가 눈에 띈다. 나무는 생기가 돌고 꽃과 풀이 살아나며 사슴과 학이 어울린다. 녹학동춘(鹿?同春)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을 상징한다. 녹은 육(?), 학은 합(合)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육합동춘(六合同春)이라고도 한다. 육합은 천지와 사방, 곧 천하를 말한다. 이백도 ‘고풍(古?)’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한 곳에 모았다’는 뜻으로 진황소육합(秦皇?六合)이라 했다.
집성촌답게 저택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왕씨 일가는 20채의 가옥과 11채의 누각, 3곳의 정원에 살았다. 가장 규모가 큰 가옥이 양화당(?和堂)이다. 대문 앞에 혼례 가마가 있다. 원앙 한 쌍이 귀퉁이에 나란하다. 옆에는 전마주(栓?柱)에 묶인 말이 있다. 기둥 머리에 혀를 쏙 내민 괴수를 새겼다. 익살일까 또는 경고일까?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모두 조심하라는 뜻이겠지. 전마주는 양쪽으로 4개씩 8개나 있다. 조각된 동물이 서로 다르다.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 듯하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조벽이 나타난다. 복숭아, 여의, 어린아이를 각각 들고 있는 신을 새겼다. 장수, 관복, 잉태이자 복록수(福??)다. 재력이 있으니 소망도 드러내 놓고 자랑한다. 가옥 한 채에 하나씩이니, 쪽문 따라 이동하는데 언뜻 봐도 많다. 대가족이 살았다. 1900년 서양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향해 침공하자 서태후와 광서제는 도피를 시작했다. 양화당에 이틀이나 머물렀다. 서태후는 왕씨 딸의 거처에서 숙식했다. 거상들은 피할 수 없으면 기회로 삼았다. 피신 비용을 기부하고 후일을 도모했다.
저택 일부는 ‘시대생활박물관’이다. 민국 시대 사용하던 물건이 전시돼 있다. 당시 물건이라는 표시가 돼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최근 물품과 섞어 전시하고 있다. 축음기, 선풍기, 전화기, 거울, 주전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다른 방에도 시계, 재봉틀, 성냥, 곰방대 등 종류가 다양하다.
갑자기 낯선 모습이 나타난다. 흔히 보기 어려운 장례식인데 조금 독특하다. 하늘도 사람도 함께 슬픈 천인동비(天人同悲)라니 공감이 된다. 기쁜 일에는 홍색, 슬픈 일에는 백색을 쓰는 중국이다. 장례를 백사(白事)라고 한다.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아니고 풍습을 꾸민 의식이다. 상주는 선글라스를 쓰고 주산도 들고 있다. 망자 옆을 지키는 종이 인형이 알록달록하다. 지찰인(??人)이라 부른다. 하인이나 시녀는 물론이고 말이나 가마, 살던 집이나 평소에 애지중지한 물건을 만들기도 한다.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데 10위안을 내라고 한다.
전(奠)이라는 글자는 제(祭)와 뜻이 같으면서도 쓰임새가 다르다. 전은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사용한다. 그 이후 제를 쓴다. 전사(奠祀)와 제사는 구분한다. 전의 윗부분 추(酋)는 주(酒)를 뜻하며 아랫부분 대(大)는 받침대인 기(?)가 변한 글자다. 추는 ‘여씨춘추’에서 농사를 주관하는 관리라고 했다. ‘예기’는 주관(酒官)의 우두머리를 대추(大酋)라 했다. 농사와 술은 일맥상통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서인 ‘이아’는 종(?)이라 했다. 전은 곧 끝이자 죽음이다. 상나라 수도였던 상추(商丘)에서 장례 용품을 파는 인생종점참(人生?点站)을 본 적이 있다. 한참 서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천왕이 지키고 있는 요재경혼(聊??魂)도 있다. 공사 중이라 문이 잠겼다. 귀신 나오는 곳으로 강시와 신부 귀신도 있고 시체를 담는 관(尸棺), 인육만두가게, 18층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청나라 소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聊?志?)’를 원형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됐다. ‘천녀유혼’은 우리나라에도 1987년에 개봉돼 화제가 됐다. 창백한 귀신 왕조현, 순박하고 남루한 장국영에 열광했다. 둘이 만나는 난약사(?若寺)도 있다고 한다.
맛집 거리가 있다. 휘장에 요리가 적혀 있어 쉽게 고를 수 있다. 차양에 거꾸로 걸린 우산이 분위기를 돋운다. 많이 맛보고 싶어도 혼자라 어렵다. 얇게 말린 두부에 참깨 양념장을 섞은 마장더우피(麻?豆皮)을 주문했다. 아주머니가 향긋한 샹차이까지 듬뿍 담아준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다. 간식이라 배가 부르진 않다. 산시를 대표하는 다오샤오멘(刀削面)을 먹지 않을 수 없다. 반죽을 어깨에 걸고 칼로 날렵하게 벗겨내는 면발이다. 더운 계절에는 국물 없이 비빔으로 먹어야 제대로다.
시녀만 33명...강태공보다 우대받는 그 딸의 정체는?
앞서 말한대로 희섭이 국호를 당에서 진이라 바꿨다. 북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진수(晋水) 부근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역사가 장수절이 편찬한 주석서인 ‘사기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진나라 사당인 진사(晋祠)는 타이위안 역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시내버스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진사는 공원과 박물관으로 나뉜다. 공원은 무료다. 최근에 만든 패방 뒤로 동대문이 나온다. 공원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휘하 군신의 동상이 보인다. 오른팔이자 재상을 역임한 선비족 장손무기, 최고의 군사전략가 이적, 선비족 출신 대장군 울지공, 재상을 역임한 위징과 마주까지 보필하고 있다. 용흥진양(??晋?)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이세민은 아버지 태원유수 이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수나라 양제가 살해되기 1년 전인 617년이다. 망설이며 반역을 도모한 아버지와 달리 상황 판단이 빨랐다. 약관에 불과한 이세민이 주도했으니 용의 발흥이라 해도 무방했다. 근무지인 진양(晋?)이 바로 이곳이다.
거의 1km를 걸어 박물관에 도착해 입장권을 산다. 진사는 여기부터 시작이다. 삼진명천(三晋名泉) 건물이 나타난다. 청나라 강희제 때 무과에 오른 양정한의 필체다. 진사 안에 유명한 샘이 3곳 있다. 샘은 곧 근본을 뜻한다. 기원전 진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지백요에 맞서 조양자, 한강자, 위항자가 연합했다. 지씨 세족을 물리치고 세 가문이 제후로 책봉됐다. 삼가분진(三家分晋)을 ‘사기’ ‘전국책’ ‘자치통감’ 등이 기록하고 있다. 세 나라의 근원이 진이라는 의미다. 모두 중원의 강국으로 성장해 전국시대 칠웅이 됐다.
도랑 건너편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명나라 시대 유리로 만든 3m 높이의 금인대(金人台)가 있다. 네 방향에 철인(?人) 4명이 서 있다. 모두 약 2m다. 북송 시대인 1097년에 만든 서남쪽 철인이 가장 오래됐다. 서북쪽, 동남쪽 철인도 1~2년의 시차를 두고 탄생했다. 유실됐던 동북쪽 철인은 1913년에 주조했다. 금신(金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대에는 금·은·동·철·주석을 모두 금이라 했다. 오금(五金)이다. 오행은 금생수(金生水)라 했다. 당시 진수의 범람으로 백성의 피해가 심각했다. 물을 달래기 위해 성모(聖母)의 수호신으로 제작했다.
바로 뒤에 9.5m의 나무 패방이 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서예가 고응원이 건축했다. 노모의 병환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첫 삽을 떠 공사를 시작하자 이튿날 호전됐다. 대월(?越)이라 썼다. 대는 보답, 월은 선양이다. ‘시경’ 주송(周?) 편에 나오는 대월재천(?越在天)이 출처다. ‘하늘에 계시는 문왕의 영혼에 대한 찬양’이다. 노모가 회생했다고 주나라 개국의 기틀을 만든 문왕에게 왜 인사를 했을까?
진사의 중심은 성모전(聖母殿)이며 문왕의 며느리를 봉공한다. 개국 군주 주무왕의 부인이기도 하다. 일등공신인 강태공 여상의 딸 읍강이다. 성모전은 원래 여랑사(女?祠)였다. 지금 건축은 북송 시대 모습이다. 가로 7칸, 세로 6칸이며 이중 처마로 19m 높이다. 황색과 녹색의 유리 기와로 덮었다. 정면의 8개 기둥에 용이 둘둘 휘감고 있다. 984년 창건된 성모전도 국보급이지만, 1087년에 만든 8마리 용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처마의 편액도 용과 어울려 품격 높은 건축물이다.
보물은 안에도 있다. 성모를 중심으로 모두 43개의 목조 조형이 있다. 그중 북송 시대 33명의 황실 시녀상(侍女像)이 행랑 안에 진열돼 있다. 당시 궁정 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시녀는 업무에 따라 옷이나 행동, 표정까지 서로 다르다. 이렇게 큰 규모의 조각 군상은 어디에도 없다. 대부분 진품이라고 한다. 보면 볼수록 생동감 넘치는 걸작이다. 진사의 삼절(三?) 중 하나다.
삼절은 성모전 오른쪽에도 있다. 주나라 때 심은 측백나무로 주백(周柏)이라 부른다. 수령이 거의 3,000년이다. 높이가 17m에 이르며 45도가량 기울어져 있다. 와룡백(??柏)이라 부른다. 성모전의 용을 향해 있으니 별명으로 어울린다. 진사를 처음 구축할 때부터 함께 있었다고 제년백(?年柏)이란 이름도 있다. 가지런할 제(?)는 ‘함께’라는 뜻이 있다.
북송 시녀상, 주나라 측백나무와 함께 샘물이 삼절이다. 성모전 왼쪽에 있는 난로천(?老泉)이다. ‘시경’ 노송(??) 편의 ‘기음지주(??旨酒) 영석난로(永??老)’에서 이름을 지었다. ‘이미 좋은 술을 마셨으니 영원히 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다. 물맛이 얼마나 술맛만큼 좋길래 불로장생이라 지었을까? 6세기에 처음 지은 정자는 지름 8m로 기둥이 8개다. 진수(晋水)의 발원이니 진양제일천(晋?第一泉)이다. 위를 바라보니 전문가 솜씨의 필체가 걸려 있다. 서예가이자 의사인 부산이 썼다. 명말청초 시대 인물로 반청 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는데 지인들의 간청으로 석방됐다. 은둔 시절 용솟음치는 샘물을 보고 ‘난로’를 썼다. 붓을 휘갈기는 손에 승천의 기세가 묻어나는 듯하다.
전설이 있다. 시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하던 며느리가 힘들게 물을 길었다. 말을 끌고 가던 노인에게 물통을 내어준다. 빈 통으로 돌아가 매를 맞겠다는 각오였다. 말과 노인은 물통을 다 비울 정도로 마셨다. 노인이 며느리에게 채찍을 남겼다. 마술을 부렸다. 물통에 채찍을 넣으니 물이 계속 솟아났다. 수신(水神)이 된 며느리가 앉았던 자리다. 지금도 솟아나고 있다. 정자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용머리에서 물이 분출하고 있다. 흐르고 흐르는 역사처럼 진나라 문화를 이어온 원천이다. 사랑의 전설이 담긴 물이라 그런지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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