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처럼

입력
2021.02.23 22:00

이른 봄꽃은 대개 잎보다 먼저 핀다. 올해 1월 23일 홍릉시험림에서 노란 복수초가 잔설을 헤치고 피어났다. 입춘을 열흘이나 앞두고 봄을 알렸다. (산림청 제공)


입춘, 우수도 지났건만 사람들 마음은 춘래불사춘이다. 벌써 두 해째다. 뒷산에서 이미 노란 복수초와 하얀 노루귀를 보았다. 올해는 봄꽃 개화 시기가 좀 빨라진다 하는데 전국의 산수유, 매화, 유채꽃, 벚꽃 축제가 취소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봄꽃들은 대개 잎보다 먼저 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봄꽃은 알몸으로 피는 것이다. 나무들은 보통 잎을 먼저 내고 햇볕을 받으면서 꽃을 내밀지만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많은 식물들은 반대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 벚꽃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조팝나무 미선나무…

이른 봄꽃들은 함초롬하니 키가 작고 예쁘다. 그 여리고 앙증맞은 것이 잔설을 뚫고 이파리의 호위도 없이 봄을 살포시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 봄 산모롱이 구석에서 조우하는 야생화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 하는 탄성 한마디에 길고 암울했던 겨울은 끝났다.

그 아이들은 왜 꽃부터 틔울까. 낭만적 스토리는 아니다. 다른 풀이나 큰 나무가 햇볕을 가리기 전에 수정해 번식하려는 강인한 생존 전략일 따름이다. 작고 연한 것들이 기댈 구석이 뭐가 있으랴. 곤충에게 쉽게 발견되도록 색색의 꽃부터 피우고, 바람에 꽃가루가 잘 날려가게 방해가 되는 이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꽃을 피울 때 필요한 온도가 잎보다 낮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쯤에서 이 시를 토설하지 않을 수 없겠다.

“벗이여/이제 나를 욕하더라도/올 봄에는/저 새 같은 놈/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봄비가 내리고/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벗이여/이제 나를 욕하더라도/저 꽃 같은 놈/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정호승, ‘벗에게 부탁함’)

시인 김선우는 이렇게 해석을 달았다. “꽃이 귀해서, 새가 귀해서, 현대인의 삶과 가슴속에 봄비가 하도 귀해서 욕으로라도 꽃으로, 새로, 봄비로 불리고 싶네. 꽃도, 사랑과 고통도, 나무도, 새도 모르는 냉혈인간이 된 내게 욕이라도 그리 해다오. 모두 잎일 때 꽃인 놈, 새가 사라진 뒤에도 새인 놈, 비 그친 뒤에도 봄비인 놈으로 기억해 다오.”

시인에겐 봄, 봄, 봄이 간절하다. 그 봄은 꼭 계절적 봄만은 아닐 거다. 잎이 돋기 전에 피어나는 봄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그는 다른 봄의 시에서 또 이렇게 노래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꽃을 보려면/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꽃을 보려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봄길’). 이 혹독한 시절에도 봄이 오고 있다. 그런데 바람만 봄이면 어쩌란 말이냐. 머리에 꽃 꽂고 꽃 같은 놈, 꽃 같은 년이 되어 스스로 봄이 될 수 있다면.

병상의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무릎 아프신 노모의 손을 잡고, 앞과 뒤에 아이들을 호위무사 삼아, 나 봄길이 되어 꽃바람 속으로 걸어가리. 내 가죽을 벗겨 그대의 구두 한 켤레와, 부드러운 소파와, 따뜻한 장갑과,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은 늘 남아 있는 지갑으로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하리(‘다시 벗에게 부탁함’). 봄을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내가 봄이 되리.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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