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의 숨결은 청승에 자지러져

입력
2021.02.2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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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만신 김금화와 무당 이야기

만신 김금화가 2년 전 오늘 세상을 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신 김금화가 2년 전 오늘 세상을 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동리의 '무녀도(1936)'는 예수교 풍파 앞에 선 무녀 모화의 이야기다. '예수귀신'에게 아들을 잃고 벌이는 모화의 마지막 굿판을 동리는 이렇게 묘사했다. "음성은 언제보다도 더 구슬펐고 몸뚱이는 뼈도 살도 없는 율동으로 화한 듯 너울거렸고(...) 쾌잣자락은 모화의 숨결을 따라 나부끼는 듯했고, 모화의 숨결은 한 많은 김씨 부인의 혼령을 받아 청승에 자지러진 채, 비밀을 품고 조용히 굽이 돌아 흐르는 강물과 함께 자리를 옮겨 가는 하늘의 별들을 삼킨 듯했다."

우련한 모화의, 무녀의 숨결은 이어 전쟁 풍파를 맞이했다. '미신꾼'을 족쳐 댄 인민군 서슬에 어떻게든 살자고 붉은 완장을 둘렀다가 경찰과 우익 청년단에게 '빨갱이'로 몰려 또 숨통을 쥐이고, 새마을운동 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기꾼이 돼 머리채 잡힌 게 또 여러 차례. 깨진 장구 그러안고, 공수로도 넋두리로도 풀 수 없는 한을, 모화의 숨결 같은 긴 한숨으로나 풀어내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잦지는 않고 버텨, 어쩌다 변덕이 일면 전통이니 예술이니 하는 추임새까지 받아가며 굿판이 아닌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신과 인간을, 춤과 노래와 사설로 이어왔다.

만신 김금화(1931.8.18~2019.2.23)의 삶이 그러했다. 황해도 무속인 집안에서 태어나 12세에 무병을 앓고, 14세에 결혼 당해 매 맞고 배곯는 시집살이 끝에 쫓겨나, 17세에 내림굿 받아 만신(여자무당)이 됐다. 그는 '더러운 귀신'을 섬긴다며 손가락질하는 개신교 등쌀과 근대 과학의 옹졸한 핍박을 견디며 기량을 닦아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탔고, 1985년 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됐다. 1983년 한미수교100주년 기념공연, 1995년 한중수교3주년 개막공연, 2002년 월드컵 특별공연을 했고,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 호암아트홀 말고도 수십 차례 해외 무대에 섰다. 그래도 그는 무당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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