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거리에서... 영원한 백발의 투사 백기완

입력
2021.02.15 14:43
수정
2021.02.15 18:1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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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서 유가족이 고인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1932년 황해도 출생인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도 치른 바 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장편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뉴스1

15일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서 유가족이 고인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1932년 황해도 출생인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도 치른 바 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장편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뉴스1

평생을 반독재 민주화와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거리의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오전 4시 영면했다. 향년 89세. 통일문제연구소 측은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어르신이신 백기완 선생님께서 오늘 새벽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셨기에 비통한 소식을 삼가 알린다"고 전했다. 백발의 사자 갈기 머리,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이름 없는 약자들의 투쟁 현장 맨 앞을 지켰던 그는 한국 재야운동의 산증인이자, 순우리말로 시와 소설을 쓰며 민족의 영혼을 지키려 했던 뛰어난 예술가였다.

◇고문과 투옥의 반복,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밑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때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주며 독립운동에 동참했던 조부는 백범 김구 선생을 집에 피신시켰고, 그때의 경험으로 백 소장도 김구 선생을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 인연이 이어져 백 소장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백범사상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백 소장은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고 어머니와 나머지 형제들은 북한에 남으면서 가족들과 헤어졌다. 백 소장은 정규교육은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유년시절 시와 소설 등에 심취하면서 사회 부조리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청년시절인 1954년부터 야학을 운영하며 나무심기 운동,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에 몸담았고, 1957년엔 평생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60년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든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민주화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반복된 투옥과 모진 고문이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1974년 유신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손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됐다. 당시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후 '이렇게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다해 쓴 장편시가 ‘묏비나리’(1980)다. 각종 집회 현장에 빠지지 않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원작이다.

◇투쟁 현장 맨 앞자리를 지켰던 거리의 투사

2015년, 여든세 살. 민중대회에 참석한 백기완 소장. 정택용 사진가 제공

2015년, 여든세 살. 민중대회에 참석한 백기완 소장. 정택용 사진가 제공

1987년 대선에선 민중운동 진영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를 호소하려는 정치적 압박 수단이었지만, 끝내 단일화는 성사되지 못했고 백 소장은 선거 이틀 전 후보직을 사퇴했다. 당시 포효하는 듯한 그의 유세 연설에 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몰려들기도 했다. 1992년 대선에서 다시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백 소장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약자를 위한 집회와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투쟁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2009년 용산 참사 투쟁,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5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에서 그는 맨 앞자리를 지켰고, 2018년 4월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거리의 연단에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말에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복직 등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서울대병원 병동에서 생전 마지막 육필로 쓴 글 역시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한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살고" 노나메기 세상 꿈꾸다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소장 모습. ⓒ이정용.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소장 모습. ⓒ이정용.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버선발 이야기' 등 순우리말로 다수의 시와 소설을 창작해낸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민중'은 '니나'로, '사상'은 '든메'로, '꿈'은 '바랄'로 고쳐 쓰는 등 일상 대화에서도 순우리말을 썼던 그의 노력에 힘입어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의 순우리말이 대중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는 생전에 '노나메기' 운동을 제창했다. 노나메기란 “돈이 있든 없든, 사람이라고 하면 머슴만 일을 시킬 게 아니라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말한다. 영원한 거리의 투사 백기완이 꿈꾸던 세상은 이제 우리의 숙제로 남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미담·현담, 아들 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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