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얼마 전 아들을 출산한 아기 엄마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어렸을 때 엄마가 제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엄마에게 너무 화가 납니다. '내가 내 아이에게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엄마로부터 ‘모자라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전문직이셨던 엄마는 늘 제게 “네 오빠는 안 그런데 어리바리한 네가 어떻게 내 딸이냐”라는 말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인지 전 엄마가 어려웠고 무서웠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꿈이 만화가였던 제가 만화책이라도 빌려 보다 들키면 엄마는 만화책을 찢어 버렸어요. 미술로 명문대 진학이 가능한 성적인 걸 아시고 뒤늦게 미술 공부를 허락해주셨죠.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해놓고선,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웹툰을 좀 그려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황당했어요.
성인이 돼서는 부모님이 선호하는 회사에 입사했어요. 일을 하면서도 상사가 이유를 묻기 위해 “왜 일을 이렇게 했어”라고 하면 저는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 튀어나와서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어요. “왜 그랬냐”라는 말은 제가 부모님께 혼날 때 늘 들었던 얘기거든요. 승진을 하자 엄마는 더 이상 제게 “네가 어떻게 내 딸이냐”라는 말을 하지 않고 주변에 제 자랑을 했어요. 결혼도 부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남자친구와는 하지 못 했어요. 그와 헤어지고 나서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친구를 사귀어 결혼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와 사이가 조금 좋아지기도 했어요. 여행이나 쇼핑을 같이 다닐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출산을 하면서 엄마와 다시 갈등이 생겼어요. 엄마는 제왕절개를 한 제게 자연분만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산후조리원에 오래 혼자 있어 우울하다고 했더니 “나는 기저귀 세탁과 각종 집안일에 연년생 키우느라 힘들었다”라며 “조리원에 있는 게 호강인줄 알아야지, 입 딱 닫고 차려주는 밥이나 잘 먹어”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제게 자꾸 나쁜 엄마라고 합니다. 기저귀를 늦게 갈아줘서, 아기를 잠시 유모차에 앉혀놔서, 아기를 배고프게 해서 울게 한다고요. 그러다 제가 욱하는 마음에 몸이 불편한 엄마에게 “몸이 불편한 엄마가 아기를 봐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하자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 이후 제가 마음에 걸려 연락해서 아이와 찾아 뵙겠다고 했더니 “애미애비가 그 모양인데 애가 예쁘겠냐”라고 해 저도 마음이 상해 연락을 끊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엄마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지현(공무원, 35세)
지현씨, 우선 엄마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내 아이를 낳아 보면 머릿속으로만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가 예쁘고 소중하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게요. 그런데 지현씨가 아이를 낳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가 너무 예쁘고 소중하다는 걸 확 느끼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과 섭섭함이 다시 한번 건드려졌을 거예요.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나한테 그렇게 했을까’, ‘어머니한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내가 그렇게 부족한 자식이었을까’라는 생각들이 들면서 당신 내면 안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다시 증폭됐을 거예요.
지현씨,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건강하게 자라게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성인이 됐을 때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과정을 일관되게 돕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되면 ‘내 아이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면 좋을까’, ‘어떤 사람으로 크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하게 되죠.
하지만 지현씨의 어머니는 그런 고민보다 ‘내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게 좋을까’, ‘내 아이가 성공해서 사회적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핵심에 두고 키우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내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보다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을지를 중심에 두셨던 것 같아요. 이런 부모일수록 자녀의 능력과 성취를 중요시해요. 능력은 사람의 됨됨이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부모는 아이의 능력을 따지고, 성공에 집착하고, 아이가 성공하지 못할까 불안해합니다. 지현씨의 어머니는 지현씨를 사랑하고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을 거예요. 그러나 자녀를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키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로 키우셨을 겁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부하라며 닦달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따르지 못하면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 거예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고, 이런 잣대를 어린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키우면 아이가 얼마나 힘들까요. 아이는 상처를 받고, 자존감과 자존심, 자신감 이 세 가지를 성장시키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현씨, 자존감은요, 내 자신이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긍심을 말해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아이를 조건에 따라, 가령 공부를 잘하거나 말을 잘 들어야 인정해주면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져요. 실제로 어머니가 매번 그러하지 않았더라도 지현씨가 주관적으로 그런 기억들이 많다면 자존감이라는 면에서 상당히 타격을 받고 컸다는 거예요. 지현씨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가 “네가 어떻게 내 딸이냐”라는 말을 하셨던 것이나 “웹툰을 그려 봐라”(그래야 너를 인정해줄게)라고 했던 것, 지현씨가 승진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지현씨를 자랑했다는 기억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말이죠.
자존심과 자존감은 나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자존심은 경쟁 상황에 놓였을 때 느끼는 감정이에요. 타인과의 경쟁에서 내가 어떻게 느껴지느냐가 자존심입니다. 인생에서는 끊임 없는 경쟁이 생기는데, 경쟁에서 이겨야만 자존심이 높아지고, 실패하거나 좌절하면 자존심이 굉장히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감은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나에게 주어지는 과제의 난이도와의 관계에서 나에게 자신이 있느냐를 따지는 거예요. 예컨대 선행학습을 너무 많이 시키면 실제로 학업능력이 좋은 아이여도 자신감이 하락하게 돼요.
지현씨도 성장과정에서 자존감과 자존심, 자신감을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현씨의 어머니가 왜 지현씨를 사랑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조건과 관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지현씨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극히 어머니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능력으로 자녀들을 평가하고 비교했어요. 자녀를 기를 때 형제 간, 또래 간, 심지어 부모 자신과의 비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많은 부모들이 저지르는 잘못된 비교는 “내가 너만할 때는 어땠다”라는 부모 자신과의 비교예요. 부모는 이런 말을 해주면 자식이 더 분발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부모가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면서 자녀의 부족한 점을 얘기하면 자녀의 자존감이 굉장히 낮아져요.
경쟁은요, 언제나 자기 자신과 하는 거예요. 그게 목표가 돼야 해요. 나보다 잘하는 친구나 형제를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좀 더 성장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어떤 점을 목표로 한 다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 해요. 그런데 남과 경쟁하면 어떻습니까. 이기지 못하면 자존심이 굉장히 떨어져요. 하물며 부모와 비교를 하게 되면 자녀는 자존심도 떨어지고, 태산처럼 높고 큰 부모를 딛고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어머니가 출산한 지현씨에게 ‘애썼다’, ‘고생했다’라는 말 대신 출산마저도 어떤 능력을 발휘해서 자연분만을 해야 성공했다고 판단해 “자연분만에 비하면 제왕절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선 안 되는 것이에요.
어머니에게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능력을 키워주고 성취와 성공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 능력과 성취가 중요한 핵심적 가치였듯, 사람마다 핵심적 가치가 다릅니다. 지현씨는 어떨까요. 당신에게는 가까운 사람과 다정하게 지내는 게 핵심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당신에게 늘 성공해야 한다고 강요했던 어머니, 칭찬보다는 지적을 많이 했던 어머니, 따뜻함을 느끼기보다 냉정함과 무서움이 먼저 느껴졌던 어머니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지현씨, 어머니의 이런 면을 신경 쓰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스스로 자각을 해야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엄마가 된 지현씨가 새롭게 ‘나는 어떤 부모로서 살아가야 하나’, ‘어떤 아이로 키워야 하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당신이 혼란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더욱 이런 부분을 잘 알아채야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당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어떤 삶이고, 당신이 행복하고 편안한 게 어떤 것인지 깊게 생각해보고 그 방향을 따라갔으면 하는 거예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꿈이 중요하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꿈은 직업이 아니에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입니다. 그러려면 자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스스로를 좀 더 알아야 해요. 이제까지는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보다는 어머니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더 많이 생각하고 살아오셨을 거예요. 파울루 코엘류 작가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구절처럼 당신도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 속에 있는 반짝이는 별을 좇고, 그 별을 잃지 말고 따라서 당신이 원하는 길을 잘 따라갔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가까운 가족과의 사랑이 무엇보다 핵심인 사람이니 당신의 아들에게 아주 온정 어린 마음의 은하수를 연결하고 지낸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어떤 특성을 가진 아이이든, 부모에게 조건 없이 받는 따뜻한 사랑은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줄 수 있는 엄마일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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