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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 쿠데타 증오하는 미얀마 청년들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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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청년 탄(26ㆍ가명)은 지난주까지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6년째 일하고 있는 고무공장에서 받는 월급 20만짯(약 15만원)이 아쉽긴 했지만,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소일하는 삶이 그리 불행하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일주일 뒤 양곤 ‘술레 파고다’ 시위 현장에서 반(反)정부 투사로 변해 있었다.
9일 수화기 너머로 그에게 ‘왜 시위에 참가했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 10년 전 유심칩 하나 못살 정도로 가난했던 탄의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유명 빵집을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군의 욕심이 모든 걸 망쳤다.” 그는 어린시절 버릇처럼 읊조리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탄과 직장 동료 13명은 7일부터 붉은색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군부 타도”를 외치고 있다. 전날 밤 군부가 야간통행 금지령을 내리며 계엄령 수순을 밟자 절반이 넘는 동료들이 두려움에 시위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계엄령이 선포되면 발포할 것”이라며 공장 복귀를 종용한 지인들을 향해 “그래서 우리가 더 열심히 독재를 물리쳐야 한다”고 수없이 소리쳤다.
양곤 시내 대형몰에서 일하는 슌(23ㆍ가명)은 전날 집회의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점심 무렵 걸어서 술레 파고다에 도착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상자 박스를 주워 피켓을 만든 뒤 즐겁게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들뜬 분위기는 반나절 만에 공포로 바뀌었다. 저녁 무렵 통금령 소식이 전해지자 자발적으로 해산하던 군중 사이에선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슌은 탄과 달리 “빛은 짧고 암흑은 빨리 왔다”면서 체념한 모습이었다. 이날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전날 10만명이 운집했던 양곤 시위는 하루 만에 규모가 절반 밑으로 쪼그라든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는 이제 ‘검은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쿠데타의 정점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은 전날 국영방송에 나와 “우리는 과거 군정과 다르다”면서 여러 유화책을 내놨다. 소수민족을 보듬는 평화협의회를 구성하고, 국가운영위원회를 만들어 공정한 총선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군 지도부가 삼권을 이미 장악한 터라 무슨 대책을 내놔도 군이 주무르는 것은 똑같다.
시위가 지속될 경우 계엄령 선포는 시간 문제나 다름 없다. 이날 경찰까지 무장을 마쳤다. 전날 수도 네피도에 이어 이날 양곤에도 등장한 물대포는 온건한(?) 진압 도구일 뿐이었다. AFP통신은 “경찰이 네피도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고무탄을 시위대에 쏘고 허공에 총기를 발사했다”고 전했다. 1988년 시민사회를 피로 물들인 ‘미얀마의 봄’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경찰은 이날 적어도 시위대 27명을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탄은 체포의 두려움을 안고 다시 거리로 나설 것이다. 슌은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한국도 미얀마와 같은 시절이 있다고 들었다. 우리의 절규를 널리 전파하고 군부 퇴진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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