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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가 박자만 젓는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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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연주에 참여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악기도 들고 나오지 않는다. 지휘자가 그렇다. 그런데도 지휘자의 회당 출연료는 단원들의 몇십배, 혹은 몇백배 이상 달하기도 한다. 대체 어떤 역할을 하길래?
우선 음악을 만드는 가장 큰 책임자다. 음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실제로 공연 완성도에 책임을 지는 자리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지휘자는 작품에서 어느 부분을 강조할 것인지, 어떻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악기들 간 균형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수십년간 이끈 이반 피셔는 지휘자를 두고 농구 코치에 비유했다. '선수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보드에 전략을 적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지휘자 역시 마찬가지다.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단원들과 전략을 짠다'.
오케스트라들을 대표하는 악장들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정하나 악장은 상임지휘자 마시모 자네티를 ‘디테일한 리더’로 묘사했다. 정 악장은 "그는 연습에 들어가기 전, 원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현악기군의 보잉(활쓰기)을 아주 자세히 논의한다. 또한 단원들과 연주법, 음의 길이, 활 위치까지 공유하는데, 지휘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서 곡을 만들어가는데 수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웨인 린 부악장은 이런 과정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쌓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오스모 벤스케(서울시향 상임지휘자)의 음악 스타일, 비트 등 우리는 공연을 거듭할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스모 벤스케 역시 우리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 해야하는지 알아 가고 있다”고 전했다.
무대에서도 지휘자는 분주하다. 시시각각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기민하게 파악한다. 지금 진행되는 악절뿐만 아니라, 다음 악절까지도 미리 내다봐야 한다. 필요한 순간엔 과감하게 개입하고, 무대 위에서 즉흥적인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그렇게 마지막 음이 끝날 때까지 임무를 수행한다.
지휘자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휘자에겐 음악을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역할이 또 있다. 바로 오케스트라를 성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한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라면 더더욱 요구되는 임무다. 짧은 시간 안에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 함께하며 오케스트라 수준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파트너가 되어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다. 오슬로 필하모닉, 밤베르크 심포니 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낸 오케스트라가 좋은 예다.
특히 2년 전 타계한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오슬로 필하모닉이 모범 사례로 꼽힌다. 마리스 얀손스는 무명의 오슬로 필하모닉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들은 유명 레이블과의 녹음작업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 등 최고의 축제 무대에 오르며 긴시간 함께 했다. 그리고 마리스 얀손스 역시 오슬로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돋움 했다.
이 경우 지휘자에게 쓰인 돈이 마냥 '비용'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투입된 일부 금액은 '자산'으로도 볼 수 있다. 비용은 소모되어 사라지는 반면, 자산은 축적되어 가치를 만든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오랜 시간 만든 소리는 곧 자산이 된다. 어느 공연이든 다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무형자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수도권 주요 오케스트라들 가운데 상임지휘자 자리가 비어 있는 곳들이 많다. KBS교향악단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그렇다. 하지만 서둘러 자리를 채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임자를 찾는 것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오랫동안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다면 그 둘은 지금까지 도달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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