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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의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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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에 잠시 홍릉에 들렀다. 때마침 폭설에 복수초는 보기 힘들다는 설중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야생화를 좋아해 야생화 입문서까지 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봄꽃은 언제나 복수초다. 이른 봄, 산 중턱에 올라가 발 디딜 틈 없이 피어난 복수초를 보면 안다. 왜 이 꽃이 봄꽃의 대명사여야 하는지.
납매, 홍매, 노루귀, 변산바람꽃, 남녘땅에는 성미 급한 봄꽃 소식이 조금씩 들려온다. 산하는 여전히 동토의 왕국이어도 꽃의 세상에선 봄이 한창이다. 내가 사는 경기 북부에도 머지않아 매화 향이 코를 자극하고, 깊은 산 북사면에는 앉은부채, 너도바람꽃, 노루귀들이 앞 다투어 피고 질 것이다. 그 기대감만으로 내 마음도 한결 봄날이다.
"벚꽃이 왜 아름다운지 알아요?" 지난해 K기자와 야생화 취재를 다니다가 이렇게 물어보았다. "글쎄요, 겨우내 꽃이 없다가 피니 예뻐 보이는 것 아닐까요?" K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하, 그보다 잎이 없어서 그래요. 잎이 있어야 할 자리까지 모두 꽃이 차지했으니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하겠어요?" 이른 봄꽃은 대부분 꽃이 진 다음에 잎이 나온다. 매화나무, 산수유 같은 나무꽃 뿐 아니라 노루귀 같이, 산 속 여린 풀꽃들도 대부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꽃들의 입장에서 보면 봄이야말로 혹독한 계절이에요. 해는 짧고 매개곤충들도 많지 않거든요. 그 속에서 수분을 하고 열매까지 맺어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래서 꽃부터 피우는 거예요. 벌레들 눈에 잘 띄려고. 봄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혹독한 겨울을 지나서가 아니라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기 때문이죠. 겨울은 차라리 따뜻하고 편안한 꿀잠 같았을 거예요." 이른 봄꽃은 신기하게도 햇볕 가득한 양지가 아니라 춥고 어두운 북사면 계곡에서 먼저 고개를 내민다. "봄꽃은 약자들일지도 몰라요. 따뜻한 남쪽은 힘센 친구들한테 빼앗기고 경쟁이 덜한 북쪽 계곡으로 피신한 거죠. 그런데 환경이 열악한 탓에 이제 친구들이 아니라 자신과 싸움을 해야 해요. 4월이면 계곡은 벌써 활엽수 잎이 무성해져 햇볕을 가리거든요. 게으름 피우다간 꽃 한 번 못 피우고 떠나야 하니까 점점 개화를 서두르는 거죠. 복수초 같은 꽃은 지리산이나 동해에서 1월 초면 벌써 꽃을 피운답니다. 따뜻한 양지라면 서두를 필요도 없었겠죠?"
하루라도 더 빨리 피기 위한 노력도 눈물겹다. 복수초는 체온을 주변보다 7~8도 끌어올리고,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등은 꽃잎을 꽃술로, 꽃받침을 꽃잎으로 바꾸면서까지 곤충들을 유혹하려 애쓴다. 개화를 앞당길수록 곤충을 불러들이기 어렵기에, 저마다 나름의 생존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봄꽃을 보면 7만년 전, 고향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로 떠난 인류가 떠올라요. 추위와 부족한 일조량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부색까지 희게 바꿨지만 그 덕분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잖아요, 생존을 위한 싸움이 진화로 이어진 겁니다."
계관시인 T. S. 엘리엇은 봄꽃이 죽은 땅에서 꽃을 피우는 이상, 거짓 희망이자 죽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겐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하지만 그건 봄꽃의 고된 투쟁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세상에, 이 작고 여린 체구 안에 이렇게 많은 싸움이 쌓여 있다니! 봄이 온다. 봄꽃이 온다. 희망과 혁명의 꽃들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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