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폭설에 배달 멈추자 사람이 보였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수도권에 폭설이 쏟아진 지난달 6일 밤 퇴근길. 서울 주요 도로는 물론 주택가 곳곳에서 배달 오토바이의 바퀴가 헛돌았다. 일부 배달기사는 아예 내려서 눈길 위로 오토바이를 끌고 가기도 했다.
20년 전 겨울 눈이 쏟아진 서울 양재동의 주택가에서 설설 기었던 때가 떠올랐다. 후륜 구동인 오토바이에 빙판길은 쥐약이다. 뒷바퀴가 쭉 밀리며 배달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졌다. 배달통 안의 피자는 한쪽으로 쏠려 우그러졌다. 아픈 것보다 배달이 늦은 게 더 걱정이었다. 떡이 된 피자를 붙잡고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었다.
1년쯤 하니 ‘번개’ 소리를 들었지만 초기엔 사고가 적지 않았다. 아니 냈다는 게 정확하겠다. 한번은 서울 개포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다 택시와 정면 충돌했다. 머리와 어깨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몸이 붕 떴다. 생명이 위급한 순간 인생의 중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는 게 구라가 아니었다. 공중 부양을 한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부모님 얼굴로 시작한 이십 평생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배달 알바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도 함께.
택시 천장에 한번 튕긴 뒤 트렁크 뒤로 날아갔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릴 때 낙법을 배운 덕인지 등부터 떨어졌다. 실눈 사이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달려오는 중년의 택시기사가 보였다. 설마 죽은 줄 알았던 걸까. 벌떡 일어나니 더 놀란 듯 했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택시 앞 유리창엔 둥그렇게 헬멧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안전모 쓰라고 잔소리를 하던 점장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 사고로 생애 첫 교통범칙금을 냈고 벌점까지 받았다. 이후에도 혼자 고꾸라져 손뼈에 금이 가는 등 사고는 끝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다른 배달 알바의 사고도 숱하게 봤다. 정지선에 나란히 서 있다 0.5초 빨리 출발한 중국음식점 배달 오토바이가 신호위반 차에 치어 날아간 건 충격이었다. 망막에 박힌 듯 그 장면이 한동안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배달 환경은 참 많이 달라졌다. 전화를 받아 일일이 쳐 넣던 주문은 스마트폰을 타고 자동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경로가 뜨니 쉬는 시간에 지도를 외우거나 거리에서 지도를 펼칠 일도 없다. 현금 결제만 가능하던 시절엔 매번 거스름돈을 챙겨가야 했지만 이젠 배달앱에서 결제가 되니 음식만 놓고 오면 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편리해졌다. 말 섞을 필요 없이 터치 몇 번으로 주문과 결제가 끝난다. 리뷰와 별점을 보고 안방에서 맛집 순례가 가능하다. 20년 전에는 꿈도 못 꿨던 신세계다.
이런 스마트한 배달 시스템의 멱살을 잡은 건 폭설이다. 배달 지연이 속출했고 일부 배달 앱은 서비스를 전면 중단했다. “배달료 따블”을 불러도 음식은 오지 않았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해진 편리함이 일순간에 멈췄다.
이유는 간단했다. 음식 선택과 주문, 결제는 스마트해졌어도 사람의 노동력이 아직은 배달의 본질이다. 누군가는 학비를 벌기 위해, 누군가는 코로나19 사태 속에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오늘도 오토바이를 탈 것이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언제든 사고를 당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그 고생을 했으면서도 편리함에 취해 잊고 살았다. 무심히 터치하는 배달 앱 뒤엔 사람이 있다는 걸.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