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본질을 직접 가리킬 수 있을까? 아니면 한낱 수단이며, 영원히 본질에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일까?
신약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이 곧 하나님이다"로 시작된다. 이는 말을 신과 대비시키는 언어에 대한 깊은 신뢰 문화를 상징한다. 그런데 논어의 '이인'편에는 군자의 덕목으로 '눌언민행(訥言敏行)' 즉 '말은 어눌하되 행동은 민첩하라'고 촉구한다. 또 '학이'에는 '교묘하게 말 잘하는 것은 어짊(仁)이 아니다'라고 아예 대못을 쳐버린다.
니체는 1882년의 '즐거운 지식'에서 "신은 죽었다. …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하여 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처럼 중국철학의 최고 고전인 주역 '계사상전' 역시, '언부진의(言不盡意)' 즉 '말로는 결코 뜻을 다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단절을 천명한다. 이것이 바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언어에 대한 부정, 즉 침묵의 문화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남자는 과묵하고 듬직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사회가 선호하는 남성상은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즉 침묵의 문화는 이제 적극적인 표현의 문화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냉탕과 온탕의 변화 속에,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붕괴와 서구화가 존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Made In India'인 불교는 언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불교가 동아시아에 정착한 지 2,000년이 되었지만, 흥미롭게도 불교는 오늘날까지 언어에 대한 깊은 신뢰를 견지한다. 미국에 이민 간 지 20년이 돼도 김치를 찾는 한국인과 같다고나 할까!
인도의 주류 인종은 코카서스산맥에서 발원한 백인의 아리안족이다. 아리안족 하면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독일의 게르만과 그리스·로마 그리고 프랑스까지 전부 아리안이다. 이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한다. 인도·유럽어족 역시 언어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견지한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수사학 논리학 웅변술 등이 발전하게 된다. 즉 유럽은 아리안적인 언어 신뢰에, 헤브라이즘적인 언어 신뢰라는 설상가상의 형세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 신뢰 문화는 종교적으로 축복과 축원 그리고 서원과 발원 등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코드 중 하나가 바로 주문과 주술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인도는 진언(眞言), 즉 '진리의 말'에는 강력한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주문과 주술이 어둠의 속성이라면, 진언은 강력한 빛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이 진언 문화가 불교를 타고 동아시아로 전래한다. 그래서 불교에는 '수리수리 마하수리'나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같은 다양한 진언이 존재하게 된다.
또 진언 중에서 장편에 속하는 긴 진언은 '다라니'라 한다. 다라니는 번역하면 총지(總持)로 '모든 좋은 것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진언계의 백화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언어를 무너트린 중국문화에는 단지 침묵만 존재할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은 왜 보나?'라는 말이 있다. 손가락을 보는 것이 문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손가락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대두하는 중국적 해법이 '그림 상징'이다.
주역의 '계사하전'에는 관물취상(觀物取象) 즉 만물을 간취하여 핵심적인 형상을 취하라고 역설한다. 또 '입상이진의(立象以盡意)'라 하여, '상징적인 형상을 통해 본뜻을 모두 다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태극과 팔괘로 대변되는 주역의 그림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 상징의 구조 속에 바로 부적이 존재한다.
부적 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분도 있다. 그러나 사실 동아시아 부적 문화의 최고봉은 주역과 직결되는 우리의 태극기다. 즉 부적은 생각보다 가까운,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양 속에 두루 녹아 있는 보편적 가치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부적과 불교의 진언 문화가 융합되면, 글을 써서 붙이는 부적형 진언이 대두하게 된다. 입춘에 문에 붙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입춘첩이 바로 양 문화의 적절점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이해하면 무척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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