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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해저터널...1980년대부터 "뚫자"→"없던 일"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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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쏘아올린 '한일 해저터널 건설 검토' 카드가 또 한번 정치권을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일 해저터널만큼 우여곡절을 겪는 이슈도 없을 것 같은데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시작이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일본이었고, 국내에서도 1980년대부터 꾸준히 "뚫어보자"→ "그러지 말자"를 반복한 단골 소재였습니다.
최초 구상은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에 나왔습니다. 일본 측에서 만든 '조선해협 철도터널 계획'에서 비롯됐는데 중국 대륙까지 침략 전쟁을 확대시킨 일본 군부가 국책으로 검토한 것이었다고 해요.
실제로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에는 해저 지질 조사를 위한 길이 570m의 조사 터널이 굴착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부산~시모노세키 직통 철도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한 이 계획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사라지는 듯했어요.
이후 해저터널 문제는 1980년대부터 다시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1981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문선명 총재가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국제과학통일회의(ICUS)에서 '국제하이웨이 한일터널 구상'을 밝혔는데요.
그는 "중국에서 한국을 통해 일본에 이르는 아시아권 대평화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전 세계로 통하는 자유권 대평화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며 "이것이 건설된다면 한중일 3국은 문자 그대로 평화고속도로로 연결돼 일체화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1983년 통일교 관련 연구단체가 연구를 시작, 일본 홋카이도대 명예교수인 사사 야스오를 중심으로 '한일터널연구회'가 설립됐어요. 3년 뒤 나고야에서 제1차 조사를 위한 파일럿 터널 공사가 첫 삽을 떴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1986년 한일해저터널연구회가 만들어졌고요.
한일 조사터널 현장을 지켜왔다는 후지하시 겐지 현장소장은 "한일 해저 조사터널은 1986년부터 터널을 파기 시작해서 현재 570m 길이까지 파고 들어갔다"며 "수십년 동안의 지질조사 결과 한일 해저터널을 굴착하는 데는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1988년 경남 거제도 일대 5개 지역에서 시추 조사도 벌어졌어요.
지역 활성화, 외교 안보 문제, 경제 수익성 문제 등으로 정치권에서 한일 해저터널은 자주 거론돼 왔지만 언제나 번복되기 일쑤였다고 해요.
정치인 중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5월 8일 한일 해저터널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993년 8월 26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한일협력위원회 제31회 합동회의에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의 개발에 관한 공동연구 등의 실천적 프로그램 등 5개 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했고요.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세계 정치 경제의 중심축이 아태지역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한일 양국 간의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구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1999년 9월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오부치 일본 총리와 한일정상회담에서 "한일 터널이 건설되면 홋카이도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니 미래의 꿈으로 생각해볼 문제"라고 언급했어요.
한국과 일본을 잇는 것이지만 해저 터널 문제는 우리보다는 일본 측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어요. 2000년 당시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방한한 자리에서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다시 한 번 공식 제의했습니다. 2003년 일본 자민당은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100년 동안 이뤄야 할 3대 국가과제로 선정하기도 했어요.
한국의 대통령들이 주로 한일 관계의 발전을 얘기할 때 해저터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어요. 해저터널은 대체로 한일 관계의 좋은 미래를 위한 촉매제 역할이라고 볼 수 있죠.
같은 해 2월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취임 첫 한일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해저터널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한일 간에 해저터널을 뚫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북한 때문에 실감을 잘 못 하는 것 같다"며 "북한 문제가 해결되면 해저터널 착공 문제가 경제인들 사이에서 다시 나올 것"이라고 말했어요. 여기서는 '북한 문제가 해결되면'이라는 조건이 눈에 띕니다. 해저터널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만들지만 북한과 관계까지 꼼꼼히 따져야 할 문제라는 것이죠.
게다가 한국교통연구원이 '한일 해저터널 필요성 연구'에서 국방 문제 등을 주요한 이유로 들며 '타당성 없음'으로 1차 결론지으면서 논의는 없던 일로 마무리되는 듯했습니다.
이후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정치권에서 공론화됐어요. 200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고건 전 국무총리는 당시 대선 공약으로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MB) 정부로 넘어가면서 해저터널 이슈는 이전보다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어요. 특히 2008년 1월 18일 문선명·한학자 통일교 총재는 국토해양부에 공익법인인 '세계평화도로재단'을 등록하며 각계 인사들을 모아, 한일 해저터널과 베링해협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베링해협 평화포럼'과 '한일 해저터널 포럼'을 각각 발족하고 학술 연구와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갔어요.
같은 해 10월 31일 청와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해저터널 타당성 여부를 묻는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의 질문에 정정길 당시 대통령실장은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할 용의가 있고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하면서 정부 차원의 추진에 다시 속도가 붙는 것 아니냐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2009년 부산연구원이 가덕도~쓰시마~이키섬~후쿠오카(222㎞) 해저터널 총 사업비로 92조원을 책정하기도 했어요. 반면 일본은 100조원이 넘게 필요한 규슈 가라쓰~이키섬~쓰시마~거제도~가덕도~부산(288㎞) 노선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총 사업비가 100조원을 훌쩍 뛰어넘어 200조원에 달할 수도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결국 2011년 1월 5일 국토해양부는 한중·한일 해저터널의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요. MB정부 들어 시작하는 듯했지만 결국 3년 만에 다시 한 번 해저터널 추진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해저터널 언급은 중앙정부 차원에서만 한정되지 않았어요. 역대 부산시장들도 지역 활성화를 위한 단골 해결 방안으로 해저터널을 꺼내들었습니다.
2014년 서병수 전 부산시장은 당시 지방선거를 위해 서부산개발 프로젝트 안에 한일 해저터널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서부산 글로벌시티 그랜드 플랜'을 공개하면서 실행 과제 중 하나로 한일 해저터널 건설 카드를 제시했습니다. 서부산 개발을 기점으로 부산을 기존의 동남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남 여수와 경북 포항까지 아우르는 광역경제권의 중추도시로 키워 세계 도시로 성장시키겠다는 구상이었어요.
2016년에는 부산시장에 출마해 낙선했던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한중일 3국의 공동 성장을 위한 자유로운 역내 경제, 물류 환경 조성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한일 해저터널 개발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2019년 이번에는 부산시가 터널에 실효성이 없다며 추진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수십년에 걸쳐 등장했다가 경제성,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없던 일이 됐던 해저터널. 그런데 4월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또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는데요. 이번에는 터널의 운명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관심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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