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혐오와 ‘210원’ 쟁취하기

입력
2021.02.03 04:30
26면


한 아파트 경비원이 근무 지역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 배우한 기자

한 아파트 경비원이 근무 지역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 배우한 기자

낮은 월급, 고되고 부당한 노동조건을 호소하는 기사의 댓글에는 “그러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 “너 말고 일할 사람 많다” “그렇게 계약했으면서 이제 와서 딴소리야” “요새 누가 노동해서 돈 버냐”라는 조롱이 달린다. 최근 KBS 직원이 “너네가 뭐래도 우린 억대 연봉, 능력되면 입사해라”며 가난·노동 혐오 대열에 합류했다. 멱살 잡고 싶은 심정과 별도로, 논쟁가치는 없겠다.

그러나 후배가 전해준 글 하나에는 생각이 많아졌다. 지난해 11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폭풍 공감을 받았다는 ‘요즘 흙수저 집안에서 애 낳으면 생기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 20대 초반의 소위 ‘가난 생존자’가 썼으며 평균소득이 오른 사회에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가 느끼는 열패감과 분노가 담겼다. ‘부’ 혹은 ‘중산층’임을 과시하기 좋은 시대라서, 저소득층 아이들의 박탈감이 ‘트라우마’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난한 부모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심지어 혐오하는 듯한 뉘앙스도 읽혔다. “부모님 세대는 정시 기회도 더 열려 있어서 무식할 정도로 언·수·외·탐만 파고 있으면 명문대 진학하기는 더 좋았고, 학벌이 좋으면 취직도 잘하고, 심지어 집값도 지금보다 훨씬 싼 시대였는데, 낳은 자식이 자라는 20년 동안 자기 명의로 된 집 한 채도 마련해본 경험이 전혀 없고 기초생활수급자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밀려나 도태된 인간이란 뜻임.” ‘도태된 인간’, 부모에 대한 진단이다. ‘아빠 월급날’이 언급된 부분이 있어, 부모가 노동자가 아닌가 싶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온 그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무한경쟁사회에서 갖은 방법으로 부를 획득한 상류층의 시각과 닮았다.

최근 우리 부(어젠다기획부) 마이너리티팀은 간접고용 노동자 100명을 인터뷰하고 ‘중간착취의 지옥도’ 시리즈를 내보냈다. 원청이 내려준 노동대가는 상당하지만, 파견·용역업체에 ‘거금’을 뜯기고 겨우 월 170만원 정도를 받는 사람들. 그들의 자녀도 월급이 적은 부모를 ‘능력 없다’고 혐오할까.

중간착취자들은 어쩌면, 노동자의 삶에서 자녀의 사랑과 존경까지 앗아가 버리는지 모른다. 월급이 180만원대인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상담원 이경화(50)씨는 용역업체가 비용을 떼어먹지 않으면, 월 280만원 가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수 처리를 하며 월 250만원을 받는 서모(54)씨도 원청인 고창군청이 내려주는 노무비를 용역업체의 착취 없이 받는다면 월급이 370만원이 된다고 했다. 고(故) 김용균씨는 원청이 책정한 직접노무비 월 522만원(용역업체에서 311만원 착복)을 그대로 받았다면, 장차 능력 있는 아빠를 예약할 수 있었다.

막대한 중간착취, 항의하면 해고(계약해지)가 ‘합법’의 틀로 짜여진 간접고용의 세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설계된 지옥에 던져놓고, 거기서 나올 자격이 없다고 조롱한다. 후배들이 취재해온 사례들을 보면서 여러 번 울컥했다. 그 중 이런 게 있었다. 한국거래소의 청소노동자로 15년을 일한 정모(65)씨가 “노조 만들고 나선 많이 받게 됐다”며 꺼내 보여준 지난해 12월 월급명세서. 그 금액은 ‘173만원’, 최저임금(8,590원)보다 시간당 210원이 더 많았다.

이진희 어젠다기획 부장

이진희 어젠다기획 부장

▶[바로가기] 중간착취의 지옥도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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